항목 ID | GC06132023 |
---|---|
한자 | 徽陵 |
영어공식명칭 | Hwireung |
이칭/별칭 | 장렬 왕후 휘릉 |
분야 | 역사/ 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5-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민정 |
[정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장렬 왕후의 능.
[개설]
휘릉(徽陵)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에 있는 장렬 왕후(莊烈王后)[1624~1688]의 능이다. 장렬 왕후의 본관은 양주로, 한원 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딸이다. 인조의 비(妃) 인열 왕후(仁烈王后)가 1635년 42세의 늦은 나이에 출산을 하다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자, 1638년(인조 16) 장렬 왕후가 왕비로 책봉되어 인조와 가례를 올렸다. 1649년에 인조가 사망하고 효종(孝宗)이 왕위에 오르자 대비가 되었고, 1659년 효종이 사망하고 현종(顯宗)이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효종이 사망하였을 때 효종에 대한 장렬 왕후의 상복 문제를 두고 예송이 일어났으며, 1674년에 효종 비 인선 왕후(仁宣王后)가 사망하자 그녀에 대한 장렬 왕후의 상복 문제로 다시 예송이 일어났다. 예송의 결과로 남인과 서인의 정권이 바뀌기도 하였다. 장렬 왕후는 1688년(숙종 14)에 창경궁에서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위치]
휘릉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구역의 끝단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에는 태조(太祖)의 건원릉(健元陵)과 문종(文宗)의 현릉(顯陵), 영조(英祖)의 원릉(元陵) 등이 있다.
[변천]
휘릉은 1688년 장렬 왕후가 사망한 후 조성되었다. 1747년(영조 23) 표석이 세워졌다. 인조와 인조의 원비 인열 왕후는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장릉(長陵)에 묻혀 있다.
[형태]
휘릉은 장렬 왕후의 능만을 단독으로 조성한 단릉(單陵) 형태이다. 능침 공간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는데, 가장 위의 상계는 봉분이 있는 구역이다. 봉분은 둥근 형태로 병풍석(屛風石)[능, 묘의 봉분 둘레에 병풍같이 둘러막아 쌓은 돌] 없이 주위에 난간석(欄干石)[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둘러싼 기둥 모양의 돌]만 둘렀다. 그 주위로는 석호와 석양이 세워져 있다. 바깥쪽의 좌우와 후면에는 나지막한 담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영혼이 나와서 놀게 하기 위하여 무덤의 앞에 설치해 놓는 직사각형의 돌]이 있고 그 양 옆으로는 망주석(望柱石)[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이 설치되어 있다. 한 단 아래의 중계에는 중앙에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이나 절 안에 돌로 만들어 세워 불을 밝히는 석등]이 있으며, 양 옆으로 문석인과 석마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가장 아래의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가 설치되었다. 능침 공간 아래 제향 공간에는 정자각이 자리 잡고 있으며, 정자각 옆으로는 1747년 표석을 세울 때 함께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비각이 있다.
[금석문]
휘릉의 표석은 1747년에 세워진 것이다. 문종 대 이후로 왕릉에는 별도의 비석을 세우지 않았으나 영조 연간에 각 왕릉에 표석을 세우는 작업이 활발하게 벌어졌고, 휘릉의 표석 또한 이때 세워진 것이다. 표석 전면에는 전서체로 '조선국장렬왕후휘릉(朝鮮國莊烈王后徽陵)'이라 새겨져 있다.
[현황]
휘릉이 속한 구리 동구릉 전체가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2009년 6월에는 조선 왕릉 전체가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휘릉은 문화재청 조선 왕릉 관리소 동부 지구 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휘릉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 왕릉 중 하나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조선 왕실의 문화와 왕릉 연구에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귀중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