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320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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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綏陵神道碑(一九零二) |
영어공식명칭 | Memorial stone for Suereung(1902) |
이칭/별칭 | 수릉 문조 익황제 표석(綏陵 文祖 翼皇帝 表石) |
분야 | 역사/ 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7-1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최상기 |
[정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조선 익종과 익종의 비 신정 왕후의 능인 수릉의 신도비.
[개설]
수릉 신도비(1902)는 익종(翼宗)과 신정 왕후(神貞王后)의 능인 수릉(綏陵)에 세워진 신도비이다. 익종은 순조(純祖)의 세자로 즉위 전에 사망했는데 아들이 헌종(憲宗)으로 즉위하면서 왕으로 추존되었다. 1809년(순조 9)에 출생해 1812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827년부터 대리청정을 시작했으나 1830년(순조 30) 2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신정 왕후는 풍은 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딸로 본관은 풍양(豊壤)이다. 1808년(순조 8)에 출생해 1819년(순조 19)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890년(고종 27)에 사망했다.
[건립 경위]
수릉 신도비(1902)는 1902년(고종 39)에 세워졌다. 『고종실록(高宗實錄)』에 따르면 1899년 익종과 신정 왕후를 각각 문조 익황제(文祖翼皇帝)와 신정 익황후(神貞翼皇后)로 추존했고 1902년 2월 13일에 다시 존호를 올렸으므로, 묘호(墓號)와 시호(諡號)의 추존에 이어 존호를 올리면서 함께 신도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위치]
수릉 신도비(1902)는 익종과 신정 왕후의 봉분 남쪽 석축에서 남동쪽으로 약 60m 떨어진 비각 안에 있다.
[형태]
수릉 신도비(1902)는 네모반듯한 모양의 농대석(籠臺石)[비석의 받침돌] 위에 비신(碑身)을 세운 후 그 위에 한옥의 지붕 모양을 본뜬 가첨석(加檐石)[지붕돌]을 얹은 형태이다. 가첨석과 농대석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비신은 오석(烏石)으로 만들었다. 전체 높이는 386.1㎝이며 가첨석·비신·농대석의 높이는 각각 77.6㎝·238.0㎝·70.5㎝이다. 전체 너비[가첨석 너비도 동일]는 164.8㎝이며 비신·농대석의 너비는 각각 102.0㎝·150.0㎝이다. 전체 두께[농대석 두께도 동일]는 115.0㎝이며 가첨석·비신의 두께는 각각 101.4㎝·34.0㎝이다. 가첨석은 팔작지붕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상세한 표현은 생략되었고 지붕 네 귀퉁이에서 추녀마루가 상당히 높게 솟아 있다. 농대석은 1단이며 문양을 새기지 않았다.
[금석문]
수릉 신도비(1902)의 비신 앞면에는 전서(篆書)로 '대한 문조익황제수릉 신정익황후부우(大韓 文祖翼皇帝綏陵 神貞翼皇后祔右)'라고 썼고, 익종과 신정 왕후에게 존호·묘호·시호 등을 올린 시점을 기록한 뒷면의 음기(陰記)는 고종이 직접 짓고 해서(楷書)로 썼다.
[현황]
수릉 신도비(1902)는 현재 사적 제193호로 지정된 동구릉 내에 있어서 문화재청 조선 왕릉 관리소 동부 지구 관리소가 관리하고 있으므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아울러 신도비의 좌측에는 이보다 앞서 1890년에 건립된 신도비가 있다.
[의의와 평가]
수릉 신도비(1902)는 1682년(숙종 8)에 건립된 영릉(寧陵)[효종(孝宗)과 효종의 비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능] 표석 이후 점점 간략화되어 영조(英祖)·정조(正祖) 시기에 확립된 조선 왕실 신도비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문화유산이다. 또한 정조 이래 어필비(御筆碑)가 증가하는 경향 속에서 고종도 자신이 직접 비문을 짓고 쓴 점과, 1890년에 세운 신도비에 이어 익종과 신정 왕후에 대한 추숭(追崇) 사업의 하나로서 신도비를 추가로 건립한 점 등은 정조를 모범으로 삼아 자신의 정통성과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려고 노력한 고종의 시도를 구체적으로 잘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