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320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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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九里東九陵穆陵丁字閣 |
영어공식명칭 | T-shaped House of Mokreung |
분야 | 역사/ 전통 시대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상기 |
[정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목릉의 정(丁) 자형 제사건물.
[개설]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九里東九陵穆陵丁字閣)은 1608년(광해군 즉위)에 조성된 조선 선조(宣祖)의 능인 목릉(穆陵)의 제사용 건물이다. 3년상 중에는 이곳에서 조석상식(朝夕上食)[혼백·신주에 아침과 저녁으로 음식을 차리는 의식]과 주다례(晝茶禮)[낮에 지내는 차례]가 이루어졌고, 3년상 이후에는 여러 길례(吉禮)가 실시되었다.
[위치]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은 선조 무덤의 남쪽 석축에서 남쪽으로 약 55m 떨어진 곳에 있다.
[변천]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은 1608년에 건원릉(健元陵)[태조(太祖)의 무덤] 서쪽 언덕에 목릉과 함께 건립되었지만, 1630년(인조 8)에 목릉을 유릉(裕陵)[선조의 비 의인 왕후(懿仁王后)의 무덤] 왼쪽으로 옮기면서 선조의 무덤과 함께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이 과정에서 의인 왕후의 신위도 목릉의 정자각에 합쳐졌고 유릉의 정자각은 훼철되었다. 1630년 이후에도 여러 차례 수리가 있었는데 1745년(영조 21)·1749년(영조 25)·1769년(영조 45)에는 벌레 먹은 기둥을 교체했고, 1816년(순조 16)·1879년(고종 16)·1899년(고종 36)에도 수리가 이루어졌다.
[형태]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은 정면 3칸·측면 3칸의 정청(正廳)과 정면 1칸·측면 2칸의 배위청(拜位廳)으로 구성된 맞배지붕[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 건물이다. 정청 전면의 주칸은 438.0㎝, 좌우 협칸은 각각 343.0㎝이며 측면의 주칸은 240.0㎝, 좌우 협칸은 각각 153.0㎝이다. 배위청의 정면 길이는 정청 정면 주칸과 같고, 측면의 1칸은 310.0㎝이다. 배위청은 3단의 장대석을 쌓아 조성한 기단 위에 다시 한 단을 쌓아 세웠고, 정청은 배위청 쪽 기단보다 한 단 높은 기단 위에 한 단을 더 쌓은 후 세웠다. 계단은 배위청 동쪽에 향로계(香路階)와 어로계(御路階), 서쪽에 서계(西階)가 있고, 정청 후면에 신계(神階)가 있다. 기둥의 포작(包作)[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은 다포 형식(多包形式)[기둥 상부 이외에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배열한 건축양식]으로 각 칸에 간포(間包)를 하나씩 두었다. 정청 지붕의 양 측면과 배위청 전면에는 비바람의 피해를 막기 위해 대형 풍판을 설치했다. 지붕 용마루의 끝에는 각각 취두(鷲頭)[전통 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장식 기와]를 두었으며, 각 내림마루[용마루에서 추녀마루를 잇는 부분]의 중간에 용두(龍頭)를 배치하고 그 아래로 잡상(雜像)을 3개씩 설치했다.
[현황]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은 2011년 12월 26일 보물 제174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은 1630년 이전되었을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남아 있는 조선 왕실의 정자각 중 유일하게 다포 형식을 취한 건물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