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43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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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廣開土太王 |
영어공식명칭 | The King Gwanggaeto |
이칭/별칭 | 영락대왕,광개토왕,광개토대왕 |
분야 | 역사/ 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집필자 | 최상기 |
[정의]
경기도 구리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친 남진 정책의 토대를 마련한 고구려의 왕.
[개설]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은 고구려의 제19대 왕으로서 이름은 담덕(談德)[중국 문헌에서는 이름을 안(安)으로 기록]이다. 374년에 출생해 386년 1월 고국양왕(故國壤王)의 태자로 책봉되었고, 391년 사망한 고국양왕을 이어 즉위했다. 412년[『삼국사기(三國史記)』의 연표에서는 광개토왕이 413년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었지만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 및 「광개토왕릉 비문(廣開土王陵碑文)」을 근거함] 10월 사망했다. 광개토태왕은 시호(諡號)로서 정식 명칭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며, 재위 중에는 영락 대왕(永樂大王)이라고 불렸다. 시호의 의미처럼 고구려는 광개토태왕 시기에 대외적으로 크게 팽창했고, 특히 광개토태왕 시기에는 다음 왕인 장수왕(長壽王)이 본격적으로 추진한 남진 정책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가계]
광개토태왕의 아버지는 고구려의 제18대 왕인 고국양왕이며, 광개토태왕을 이어 즉위한 장수왕[이름은 거련(巨連)]이 광개토태왕의 아들이다.
[활동 사항]
광개토태왕은 즉위 이후 주변 여러 지역을 공략했다. 우선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시킬 만큼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압박하던 백제의 기세를 꺾고 공세를 강화해 백제의 주요 요충지들을 함락시켰다. 특히 「광개토왕릉 비문」에 따르면 396년에는 백제의 도성이 시야에 들어오는 한강 하류의 북쪽 연안 지역까지 진격해 백제 아신왕(阿莘王)으로부터 영원히 복종하겠다는 서약을 받았으며, 각종 포로와 전리품을 획득하고 58성 700촌을 차지했다. 이후에도 광개토태왕은 백제를 여러 차례 격파했을 뿐만 아니라 왜(倭)의 공격을 받은 신라가 구원을 요청하자 신라의 도성이 있는 경주까지 군대 5만 명을 보내 왜군을 축출했다. 요동 지역을 침입한 중국의 후연(後燕)을 격퇴하고 거란[契丹]·숙신(肅愼)·동부여(東扶餘) 등 주변의 군소 종족 집단들도 굴복시켰다. 아울러 392년에는 평양 지역에 9개의 사찰을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장수왕이 평양 천도와 함께 본격적으로 추진한 남진 정책의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묘소]
광개토태왕의 무덤은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 지역에 있는 태왕릉(太王陵)과 장군총(將軍塚) 중 하나일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상훈과 추모]
광개토태왕이 사망하고 약 3년이 지난 후, 장수왕은 광개토태왕의 시신을 무덤에 묻고 대형 석비[광개토태왕릉비]를 세움으로써 아버지 광개토태왕을 추모함과 동시에 왕릉 관리 방침을 명확히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