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778
한자 李達善
영어공식명칭 Lee Dalseon
이칭/별칭 겸지(兼之),호산(湖山)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홍창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57년연표보기 - 이달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83년 - 이달선 생원 및 진사 입격
활동 시기/일시 1486년 - 이달선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90년 - 이달선 사간원정언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92년 - 이달선 사헌부지평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95년 - 이달선 장령 임명
몰년 시기/일시 1505년연표보기 - 이달선 사망
추모 시기/일시 1574년 - 이달선 묘갈비[화순 광산이씨 승지공비] 건립
성격 문관
성별
본관 광산(光山)
대표 관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장령

[정의]

조선 전기 광주 지역 출신으로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장령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이달선(李達善)[1457~1505]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겸지(兼之), 호는 호산(湖山)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일영(李日英), 할아버지는 필문(篳門) 이선제(李先齊), 아버지는 예조참판(禮曹參判) 이형원(李亨元)이고, 어머니는 이권(李惓)의 딸이다. 안요경(安堯卿)의 딸 순흥안씨(順興安氏)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한림(翰林), 수찬(修撰) 등을 역임한 이공인(李公仁)이고, 차남은 이공충(李公忠)이다.

[활동 사항]

이달선은 1486년(성종 17)에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임명됨으로써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489년(성종 20)에 전적(典籍)으로서 임금에게 『주역周易』을 강의함에 의리에 밝게 통하여 성종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이후에는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장령(掌令) 등을 지내면서 도첩제의 개혁, 군액의 확보 등을 건의하였다. 성종이 죽은 뒤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편수관으로 이름을 올렸고 그 공으로 상을 받았다. 그러나 1498년(연산군 4)에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장형(杖刑)을 당하였고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 무오사화의 발생 원인에 사초(史草) 문제가 있었던 만큼 편수관 중 한 사람이었던 이달선 역시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이달선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은 윤구(尹衢)는 이달선에 대해 “자신을 지킴에 절조가 있었으니 청렴을 근본으로 삼았다네. 세상에 이름을 드날렸으니 문장으로 소문이 퍼졌다네. 남을 시기하지도 않았고 복록(福祿)을 구하지도 않았으니 위태롭고 혼란한 세상에서도 몸을 온전히 보전했다네. 자손에게 청렴과 결백을 물려주셨거늘, 세상 사람은 어찌 물려준 것이 없다고 하는가. 아! 선생 같은 분은 옛 성현 중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분이라네.”라고 칭송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달선이 지은 ‘신륵사(神勒寺)’라는 오언절구가 『속동문선(續東文選)』 권 9에 실려 있는데, 시구는 다음과 같다.

선방승이적(禪房僧已寂)[선방의 스님들 고요해졌는데]

독좌야장분(獨坐夜將分)[혼자 앉았으매 밤중이 지내려 한다]

지유어주과(知有漁舟過)[고기잡이배가 지나감을 알 수 있다니]

강심인어문(江心人語聞)[강 복판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린다]

[상훈과 추모]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 655-9번지에 이달선의 묘갈비인 ‘화순 광산이씨 승지공비(和順光山李氏承旨公碑)’가 세워져 있다. 이달선 묘갈비는 1576년(선조 9) 이달선의 둘째 아들인 이공충이 세운 것으로, 춘추관기사관 등을 역임한 귤정(橘亭) 윤구(尹衢)가 비문을 짓고, 이산해(李山海)가 글씨를 썼으며,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1574년(선조 7)에 음기(陰記)를 지었다. 2018년 4월 19일에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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