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16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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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Cooperative Farming |
분야 | 생활·민속/민속,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최인학 |
[정의]
경기도 광명 지역에서 농사일을 공동 작업으로 수행하던 마을 단위의 조직.
[개설]
두레는 촌락이나 리(里) 단위에서 일을 함께 하기 위해 구성되는 노동 조직이다. 두레는 농촌 사회의 상호 협력·감찰(監察)을 목적으로 마을 단위로 조직되었으며, 주로 농번기의 모내기에서 김매기를 마칠 때까지 시행된다. 광명 지역에서는 각 자연촌 1개 마을을 단위로 두레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자경리마을처럼 자경길·덕안·데부뚝마을·궁촌·새터말 등 합동으로 두레를 내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두레는 조선 후기에 모내기법이 도입되면서 보편적인 농촌의 생활 풍습으로 정착되었으며, 농민 문화의 풍물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자영민이 감소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운영]
두레는 보통 약 20~30인 정도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고[식골·양지편·원광명·노리실·밤일·가리대 등], 큰 마을의 경우에는 40인[두길], 50인[사들]의 두레도 있었다. 두레가 시작되면 아침 일찍 징을 치며 기상을 재촉하고, 두레꾼은 이 소리에 잠을 깨어 채비를 한다.
두레꾼이 모두 모이면 농기를 들고 풍물을 치면서 두레 논으로 향하였다[노리실]. 두레에 사용되는 농기인 호미는 마을에 있는 대장간이나 안양장에서 구입하였고, 직접 서울까지 나가서 구하기도 하였다. 두레에는 보통 다섯 끼를 먹었다[원광명 등]. 즉 세 끼 식사와 술참이 두 번 제공되는데[밤일], 새참은 아침 10시 경과 오후 4시 경 정도에 나왔고[노리실], 식사로는 밥과 술, 밀장국 등이 주로 나왔다[노리실].
두레는 초벌로 하루에 약 992㎡[300평]가 가능했고, 두벌매기는 두어 마지기 정도 하였다[노리실]. 마을의 과부와 병이나 유고로 노동력을 낼 수 없는 논은 무보수로 노동력을 제공하기도 하였다[두길]. 마을 사람들은 두레를 통하여 주로 김매기를 해결하였다[두길·식골·양지편·원광명·노리실 등]. 때로는 두레를 통하여 모내기까지 해결하기도 하였지만[사들·밤일·가리대 등] 어디까지나 김매기를 주로 하였다.
두레는 보통 김매기가 대략 끝나는 7월 칠석 경에 끝나거나[두길], 백중 정도에 마무리되었다[노리실]. 이보다 조금 빠른 음력 6월 15일 경에 끝나거나[가리대], 조금 늦은 7월 그믐에 끝나는 마을도 있었지만[양지편], 대부분 7월 중순 중에는 마무리되었다. 끝날 때는 하루를 잡아 크게 노는데, 이를 ‘두레파작’이라고 부르거나[노리실] 호미걸이[두길·자경리·양지편], 호미씻이[원광명] 등으로 불렀다.
두레파작 때 벌어지는 마을 잔치는 두레패에서 직접 내거나[원광명], ‘자리품’을 통해 해결하기도 하고[노리실], 형편이 넉넉한 집에서 내기도 하였다[양지편]. 자리품이란 두레가 빨리 끝나면 두레가 없는 마을로 원정을 나가 공동으로 품 파는 일을 말하며[두길·식골·노리실], 그 당시 보통 3일 노동에 쌀 1말 정도를 품값으로 계산하여 받았다고 한다[노리실]. 이렇게 준비된 마을 잔치의 음식은 막걸리와 국수 등 간단한 정도였지만 노동의 피로를 씻고 이웃 간의 정을 나누며 하루 종일 큰 잔치를 벌이고 즐겼다고 한다.
두레는 보통 한 집마다 한 사람이 나왔다. 두레 결산도 한 사람을 기준으로 보통 한 마지기[200여 평] 할 일로 결산하지만[사들], 혹 1명씩 추가될 때마다 1인당 보리 1말[2일치 품삯] 또는 쌀 1말[3일치 품삯] 등으로 추가 지급하였다[밤일].
[변천]
두레는 보통 일제강점기에 흥행하였고[식골·자경리], 6·25전쟁 전까지는 일반적으로 행해졌지만[가리대·사들], 마을에 따라서는 6·25전쟁 이후에도 시행되거나[두길], 1970년대까지 행해지기도 했다[밤일]. 두레가 소멸된 이유를 마을 사람들은 일제의 침략 정책에 따라 풍물 자체가 소멸되거나[식골], 풍물을 치는 제비꾼이 없기 때문에 소멸되었다고 말한다[두길·자경리]. 그러나 이는 사회적 영향과 개인적인 요인이 클 것이고[원광명], 더 나아가 기계화의 영향[밤일]으로 인하여 더 이상의 공동 노동이 필요치 아니한 것도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