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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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德川里 烽燧- |
영어공식명칭 | Deokcheonri' Fire Signal Remain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덕천리 산39-2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박장호 |
소재지 | 덕천리 봉수터 -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덕천리 산3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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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봉수터 |
[정의]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덕천리에 있는 시대 미상 봉수터.
[개설]
덕천리 봉수터는 시대 미상의 봉수 유적이다. 봉수 제도는 횃불과 연기로 국경 지방의 급한 소식을 중앙에 전하던 일종의 통신 제도이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낸 것으로, 역마나 인편보다 시간을 단축할 수 있어 전근대 시대에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인 통신 방법이었다.
봉수가 행해진 것은 일찍이 삼국 시대부터였으나 본격적으로 법제화된 것은 고려 후기다. 조선의 봉수제는 고려의 제도를 토대로 정비되었으며, 신속성을 바탕으로 지방의 급변하는 민정이나 국경 상황을 상급 기관인 중앙의 병조에 연락하였다. 즉, 국가의 정치·군사적인 전보 기능을 목적으로 설치 활용된 통신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봉수제는 파발·역참 제도와 병행되면서 치폐(置廢)를 거듭하다가 1894년(고종 31) 현대적인 전화 통신 체제로 전환하였다.
조선 시대 문헌상 경산 지역에 설치된 봉수는 경산현의 성산봉수(城山烽燧)[대구광역시 수성구 소재]와 하양현의 시산봉수(匙山烽燧) 2곳뿐이다. 이외에 대왕산 봉수터와 덕천리 봉수터가 현재 경산시 행정 구역 안에 있지만, 문헌상 확인되지는 않는다.
[변천]
덕천리 봉수터에 관한 전통 시대 문헌 자료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아 내력을 밝히기 어렵다.
[위치]
덕천리 봉수터는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덕천리 마을 뒷산에 있다. 마을에서 동쪽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산 정상에 오르면 봉수대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덕천리 봉수터에 대한 발굴 조사는 실시되지 않았다.
[현황]
덕천리 봉수대는 허물어져 흔적만 남아 있다. 석재와 석축하였던 석열이 남아있는데, 둘레는 200m이다. 방화장의 흔적은 찾을 수 없으며, 석축 가운데 봉돈으로 추정되는 높이 50㎝, 둘레 10m 정도의 돌무더기가 있다.
[의의와 평가]
덕천리 봉수터는 사료의 부족으로 내력을 밝힐 수 없지만, 대왕산 봉수터, 시산 봉수터와 함께 경산 지역 봉수 운영의 일면을 이해할 수 있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