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7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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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聲旭 |
영어공식명칭 | Kim Seonguk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영배 |
출생 시기/일시 | 1870년 8월 15일 - 김성욱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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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김성욱 영해 만세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49년 3월 15일 - 김성욱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김성욱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출생지 | 김성욱 출생지 -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평사리 65 |
거주|이주지 | 김성욱 거주지 -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원황리 |
활동지 | 김성욱 활동지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읍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성욱(金聲旭)[1870~1949]은 경산 출신으로 1919년 3월 18일 열린 영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가계]
김성욱은 1870년 8월 15일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평사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이후 경상북도 영덕군으로 이주하였다.
[활동 사항]
김성욱은 경상북도 경산 출신으로 1919년 3월 당시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원황리에 거주하였다. 영덕 지역에서는 북장로파 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 구세군 교직자 권태원(權泰源), 원황동[원황리]에 거주하고 있던 장로파 교회 조사 정규하(丁奎河) 등이 영덕의 여러 인물들과 더불어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원황동 구장 안상식(安商植)이 김성욱의 집을 방문하여 만세운동 참여를 건의하였고, 김성욱도 적극 찬동하였다. 김성욱은 3월 18일 정오 무렵 영해 성내장터로 들어갔다. 시장에는 정규하가 이끈 개신교 신자와 송천동의 권씨 일족, 남효직(南孝直)·남계병(南啓炳) 등이 이끈 주민들, 시장을 보러 온 군중 등 약 2,000명이 집결하였다. 정규하 등 주도층은 사전에 준비한 태극기와 ‘한국독립만세’라고 쓴 종이를 군중들에게 배포하였다. 오후 1시경 정규하 등은 시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김성욱은 같은 마을의 서삼진(徐三辰)·김동택(金東澤)·김성규(金聲奎) 등과 함께 준비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며 시위행진에 나섰다. 이때 영해경찰관주재소 일본 경찰들이 달려 나와 제지하기 시작했다. 시위군중은 읍내 각지로 분산되어 일제 지배기구를 공격 파괴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만세운동 열기가 더욱 고조되는 가운데, 일본 경찰 영목학차랑(鈴木鶴次郞) 등은 해산을 요구하고 태극기를 빼앗으려 하였다. 이에 분노한 김성욱은 시위군중과 함께 돌멩이로 주재소 유리창을 깨뜨리고, 현관에서 순사부장을 넘어뜨린 후 구타하고 상의를 벗겨 찢어버렸다. 또 다른 일본인 순사 및 한인 순사 2명을 구타하고 모자와 칼을 빼앗아 망가뜨렸다. 이어 사무실로 들어가 기물과 서류 등을 파기하였다. 이때 주재소의 지원 요청을 받은 영덕경찰서 서장 무의손(茂義孫)과 4명의 경찰이 황급하게 출동하여 시위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시위군중의 위세에 눌려 철수하려 하였다. 김성욱은 시위군중과 함께 무의손 등을 추격 포위하여 총과 칼을 빼앗고, 제복을 찢은 후 곤봉으로 구타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수본여관(水本旅館)에 감금하였다. 만세시위는 이튿날까지 계속되었으나, 일본 헌병과 군인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남긴 채 시위군중은 해산하였다. 김성욱은 그 후 일본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에서 체포되어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김성욱은 1980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