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7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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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仁鳳 |
영어공식명칭 | Kim Inbo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출생 시기/일시 | 1920년 9월 4일 - 김인봉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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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30년대 - 김인봉 자인공립보통학교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44년 7월~8월 - 김인봉 대왕산 죽창의거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82년 7월 25일 - 김인봉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6년 - 김인봉 대통령 표창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김인봉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5월 31일 - 항일대왕산죽창의거공적비 건립 |
출생지 | 김인봉 출생지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사월리 154 |
거주|이주지 | 김인봉 거주지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사월리 154 |
학교|수학지 | 김인봉 학교 -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
활동지 | 김인봉 활동지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
묘소 | 김인봉 묘소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송내리 36-3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결심대 정보연락대원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인봉(金仁鳳)[1920~1982]은 일제의 강제징용에 대항하여 경산 지역에서 일어난 결심대(決心隊)의 대왕산 죽창의거(大王山竹槍義擧) 때 정보연락대원으로 활약하였다.
[가계]
김인봉은 1920년 9월 4일 경상북도 경산군 남산면 사월리 154번지에서 출생하였다.[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1916년 7월 18일 출생으로 되어 있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아버지는 김해영(金海泳), 어머니는 최필야(崔弼耶)이다. 김인봉은 자인공립보통학교(慈仁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남산면 농업지도원을 거쳐, 1942년 남산면사무소의 기수(技手)로 근무하였다.
[활동 사항]
김인봉은 자인공립보통학교(慈仁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남산면 농업지도원을 지냈다. 1942년 남산면사무소의 기수(技手)로 임명되었다. 1940년대로 접어들면서 일제는 전시동원 체제를 강화하고 한국인에 대한 징병(徵兵)과 징용(徵用)을 강요하였다. 그런 가운데 남산면 사월리 출신의 박재달(朴在達)이 남산국민학교에서 징병·징용 훈련을 받고 있던 남산면 일원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였다. 이때 김인봉도 박재천과 함께 참여하였다. 박재달과 김인봉은 등은 모두 세 차례에 걸친 회합을 통해 동지규합과 탈출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7월 26일 대왕산으로 탈출할 때까지, 김인봉은 제반 정보를 탐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김인봉의 경우 당시까지도 남산면사무소 기수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국 변화와 일제의 정책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대왕산에 오른 26명의 청년들은 결심대를 조직하고 편제를 정한 뒤 일경과 투쟁하였다. 김인봉은 대왕산에 오르는 대신 마을에 남아 박재달·박재천과 더불어 정보연락대원으로서 이들을 후원하였다. 그러나 식량공급이 여의치 않아지자, 8월 9일 대왕산에 있던 대원들이 모두 하산하였다. 이후 김인봉과 결심대원들은 자신들의 마을에 은신하였지만, 8월 10~13일 사이에 일경에 의하여 모두 체포되었다. 체포 후 김인봉은 남산면사무소에서 이틀 동안 조사를 받았으며, 경산경찰서로 이송되어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44년 10월 4~5일경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받는 등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1945년 8월 17일 소송이 취하되어 출소하였다. 해방 후 남산면사무소에 근무하였으며, 사월동장을 지냈다.
[묘소]
김인봉의 묘소는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송내리 산36-3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인봉은 1986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1995년 5월 31일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사월리에 항일대왕산죽창의거공적비(抗日大王山竹槍義擧功績碑)를 건립하여 일제에 항거한 것을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