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7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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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羅相基 |
영어공식명칭 | Na Sanggi |
이칭/별칭 | 나상방(羅相方)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나상기(羅相基)[1901~1981]는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가계]
나상기는 다른 이름으로 나상방(羅相方)을 쓰기도 했다. 1901년 12월 17일 경상북도 경산군 고산면 욱수동[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욱수동]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나상기는 계성학교 재학 중 대구 서문시장에서 열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대구의 남성교회 목사 이만집을 비롯하여 계성학교의 교사 백남채(白南埰)·최상원(崔相元)·권의윤(權義允)·최경학(崔敬學) 등은 3월 8일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에 대구의 계성학교·신명여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성경학교 학생들도 서로 제휴하여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로 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거사를 준비해 나갔다. 당시 계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나상기는 같은 학교의 6학년 심문태(沈文泰)를 비롯하여 4학년 최영학(崔永學), 3학년 김재범(金在範) 등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하고 참여하였다. 3월 8일 오후 3시 대구 서문시장을 출발, 군중 700~800명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며 동성정(東城町)까지 행진하였다. 그러나 나상기는 곧 피체 당하였고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고 상고하여 1919년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2년간 집행유예로 출감하였다.
[상훈과 추모]
나상기는 2019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