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03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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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河東縣 |
영어의미역 | Hadong-hyeon Administrative District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해영 |
[정의]
조선 전기부터 1704년까지 경상남도 하동군에 설치된 지방 행정 구역.
[제정 경위 및 목적]
하동현은 태종조에 현감을 둔 이래 숙종조에 하동도호부로 승격되기 이전까지 지금의 하동 지역 일부의 행정상 구역이다.
고려 시대 이래 현은 현령이 다스리는 고을로 행정상 편제되어 있었으나, 실제로 현령이 파견된 고을은 많지 않았고 대부분 이웃한 주읍(主邑)의 속현으로 존재하였다. 고려 후기 이래 점차 속현에도 감무(監務)로 칭하는 최하급 지방관이 파견되었는데, 하동군에도 1172년(명종 2)에 감무가 파견되었다. 조선 태종 때에 감무를 현감으로 고쳐 칭하면서 현에는 현령이 다스리는 고을과 현감이 다스리는 고을이 있게 되었다.
[관련 기록]
『태종실록(太宗實錄)』 15년(1415) 3월 계해조에 “승정원과 육조에 명하여 갑오년에 병합한 18개 군(郡)의 편부(便否)를 의논하여 아뢰게 하였는데, 하동·거창·부령·이성·풍천·덕천·자산의 7개 읍은 옛 이름을 복구하고, 거제·남해·석성·보안·은률·맹산·박천·은산의 8개 읍은 다시 세웠다”라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하동현 연혁조에 “본조 태종 갑오년에 남해현을 합하여 하남현령(河南縣令)으로 일컫다가, 을미년에 다시 나누어서 하동현감을 두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같은 내용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보인다. 하동현이 하동도호부로 바뀐 배경과 시기에 대해서는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의 하동부 건치연혁에 “숙종조 임오년에 고을 백성들이 섬진강 일대는 마땅히 관문으로 삼아야 한다고 호소하여 임금의 윤허를 받아 진주 땅이던 악양, 화개, 진답, 적량의 네 동리를 하동에 떼어 붙이고 계미년에 읍치를 섬진강 변의 진답면 두곡으로 옮기고 갑신년에 도호부로 승격시켰다”라고 하였다.
[내용]
지금의 하동이 행정 구역상 하동현으로 불리게 되는 때는 조선 태종조에 현감을 두면서 비롯되었다. 하동은 신라 때의 한다사군을 경덕왕 때 하동군으로 개칭한 이래 고려 시대를 통해서 줄곧 군호(郡號)를 지닌 고을이었으나, 현종 때에 진주목의 속군이 된 이래 지역 발전이 부진하였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인근의 남해현이 피폐해지자 1414년(태종 14) 일시적으로 하동과 남해를 하나의 현으로 통합하여 하남현으로 한 뒤 이듬해 이를 다시 분리하면서 하동은 현감이 다스리는 고을이 되었다. 이후 하동은 1704년(숙종 30)에 도호부로 승격되기까지 현령보다 낮은 직급의 지방관인 현감이 다스리는 고을로 발전하였다.
[변천]
하동현은 1704년(숙종 30)에 승격하여 도호부가 되면서 고을의 영역이 확대되고 치소를 진답면 두곡으로 옮겼다가 이후 1730년(영조 6) 읍치를 다시 나동(螺洞)으로 옮기고, 1745년(영조 21) 또 항촌(項村)으로 치소를 옮겼다가 1896년(고종 33) 전국적인 행정 구역 개편으로 군이 되었다. 1906년 진주의 모방곡·가서·종화·운곡·오대·전두·북평·선천·동곡의 아홉 동리가 하동군에 내속하고, 1914년에 곤양면과 금양면, 삼거리 서면의 각 1부가 합쳐져 본군에 속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지금의 하동군은 그 연혁이 한다사군, 하동군, 하동현, 하동도호부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하동에 현감이 파견되기까지 하동의 행정 구역은 대체로 비슷하였으나, 1704년에 하동현이 하동도호부가 되면서 비로소 행정 구역이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 강점기의 행정 구역 개편 과정에서 관할 구역이 점차 확대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