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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0534
한자 河東雙磎寺金剛門
영어의미역 Geumgangmun gate of Ssanggyesa Temple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8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곽승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74년 12월 28일연표보기 - 하동 쌍계사 금강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7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하동 쌍계사 금강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개축|증축 시기/일시 1641년연표보기
개축|증축 시기/일시 1854년연표보기
개축|증축 시기/일시 1979년연표보기
현 소재지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8 지도보기
성격 금강문
양식 익공 맞배지붕
정면 칸수 3칸
측면 칸수 2칸
소유자 쌍계사
관리자 쌍계사
문화재 지정번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지리산 쌍계사에 있는 조선 후기 건축물.

[개설]

지리산 쌍계사는 722년(성덕왕 21) 대비화상삼법화상이 세웠고, 처음에는 옥천사라 불렀다. 뒤에 정강왕[?~887]이 절 주변의 지형을 보고 두 개의 계곡이 만난다고 하여 쌍계사로 고쳤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소실된 것을 벽암선사가 1632년(인조 10)경에 터를 옮겨 새로 지었다. 하동 쌍계사 금강문도 이때 새로 중건되었는데, 현재의 건물은 1979년에 수리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위치]

하동 쌍계사 금강문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7번지 지리산 쌍계사로 들어오는 진입부에 세워져 있다.

[변천]

하동 쌍계사 금강문은 840년(문성왕 2)에 진감선사(眞鑑禪師)가 창건하였을 때 처음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의 사례는 알 수 없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1641년(인조 19) 벽암선사가 중창할 때 새로 중건되었다. 1854년(철종 5) 성첨선사에 의해 중수되었고, 1979년 고산선사에 의해 중수되었다.

[형태]

하동 쌍계사 금강문은 전체적으로 부재 크기가 다소 작아서 가냘프고, 약한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건축 양식은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익공식(翼工式)의 1층 건물이다.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기와로 처마는 겹처마이고, 양측 박공(牔栱)[맞배지붕의 측면에 생기는 삼각형 벽]에는 풍판(風板)을 달았다. 정면 3칸인 가운데를 개방하여 통로로 사용하였고, 측면 양 측칸은 벽으로 막아서 금강역사(金剛力士)를 두고 있다. 또한 사찰 밖을 향하는 사자를 탄 문수동자상과 사찰 안으로 들어가는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상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 하동 쌍계사 금강문 외벽에는 12지신이 그려져 있으며, 중앙의 개방된 정면 통로 위에는 홍살문을 만들어놓았다. ‘금강문(金剛門)’이란 액자(額子)는 벽암선사의 글씨이다.

[현황]

하동 쌍계사 금강문지리산 쌍계사에서 소유와 관리를 맡고 있다.

[의의와 평가]

하동 쌍계사 금강문일주문 다음에 통과하는 문으로서 쌍계사 천왕문과 함께 사찰 안으로 들어오는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며, 불법을 수호하고, 속세의 더러움을 씻어주는 의미 있는 장소이다. 금강역사는 부처의 불법과 승려들에 대한 믿음이 견고하여 불교를 수호하고 악(惡)에는 철퇴를 내리는 천신(天神)이다. 왼쪽에는 항상 부처 곁에 있는 밀적금강(密跡金剛),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이 있다.

밀적금강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고, 오른쪽의 나라연금강은 입을 벌리고 있다. 이는 처음과 끝을 잇는 영원성과 통일적인 완성을 상징한다. 또한 아와 훔을 나타낸 것이기도 한데, 들이고 내쉬는 숨의 바람이며 일체중생의 성덕으로 자증과 타화를 나타낸 것이다. 자증(自證)은 자신이 스스로 깨달음을, 타화(他化)는 타인을 교화하거나 지도함을 말한다. 따라서 쌍계사 일주문을 넘어 금강문으로 들어오는 중생들이 본래부터 자증과 타화를 갖추고 있음을 알려주는 상징으로 조성된 사상적 의의가 있다. 건물 외벽에 12지신이 그려진 것은 조선 후기의 불교가 민중의 민속신앙을 적극 수용했다는 상징적 의미를 보여준다. 나아가 정면 통로 위의 정려문과 같은 홍살문을 만들어놓은 것은 불교와 유교가 교섭되는 양상을 잘 느끼게 해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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