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08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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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上元 |
영어음역 | Daeboreum |
영어의미역 | First Full Moon Day |
이칭/별칭 | 상원,정월 대보름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집필자 | 남성진 |
[정의]
경상남도 하동 지역에서 음력 1월 15일을 전후하여 전해 내려오는 명절 풍습.
[개설]
대보름은 가장 큰 보름이라는 뜻으로 음력 정월 보름께에 지내는 명절이다. 이때에 일 년 중 가장 많은 의례와 놀이를 펼치는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구성원들의 단결과 화목을 조성한다. 오늘날 하동 지역에서는 세시 풍속이 많이 중단되었지만 대보름과 관련된 민속은 대체적으로 전승되고 있다.
[연원 및 변천]
대보름은 새해 첫 번째 큰 보름날이라는 뜻이다. 한자어로는 ‘상원(上元)’이라고 하는데 도교적인 명칭으로는 천관(天官)이 복을 내리는 날이라 한다. 조선 시대 문헌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대보름날 집안에 등잔불을 켜놓고 밤을 새운다는 기록이 있는데 오늘날에도 이 풍속은 전승되고 있다. 대보름에는 한 해 가운데 가장 크게 뜨는 보름달을 맞이하여 의례를 중심으로 각종의 축원을 기원하고 놀이를 펼친다. 달의 생성에 맞추어 농경과 관련된 기풍과 마을의 기복을 바라던 대보름의 세시 풍속은 오늘날 삶의 풍요와 새해 소망을 기원하는 행사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절차]
1. 의례
하동 지역에서는 정월 대보름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으며 정성을 드려 의례를 행하였다. 대보름 아침이 되면 작은 상에 밥과 나물, 술, 과일 등으로 간단히 제물을 차려 두고 성주 제사를 지냈다. 정월에 조상에게 지내는 차례처럼 온 가족이 모여서 지내지는 않고 소규모로 간략하게 지내며, 가옥 신에게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고 한 해 풍년을 바라며 예축 의례를 행한다. 또 달집태우기를 할 때면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이 헌 옷가지를 갖다 내걸고 태우면서 달에게 절을 하며 소원을 빈다. 그리고 점쟁이한테 물어서 신수가 나쁘다면 속옷도 태우고 불이 다 꺼질 때까지 주변을 돌면서 자식들 잘 되기를 빌며 가족의 소원 성취를 기원한다.
한편 대보름달이 떠오를 때에 맞추어서 달집 입구에서 달집 고사를 지낸다. 마을 당산제를 지낼 때처럼 제물을 진설한 후 축문 읽기를 하고 초헌관·아헌관·종헌관의 순서대로 제례를 지낸다. 이후 소지(燒紙)[부정을 없애고 신에게 소원을 빌기 위하여 흰 종이를 태워 공중으로 올리는 일]를 하고 마을 주민이 고사 음식을 나눠 먹으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 주민과의 화합을 다진다.
2. 풍속
1) 더위팔기
하동 지역에서는 보름날 아침에 더위를 판다고 하여 이웃에 갔다가 적당한 사람을 만나면 이름을 부른다. 이때 대답을 하게 되면 “내더구 네더구 말따구”와 같은 소리를 하며 더위를 판다. ‘내 더위를 네가 다 가져가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2) 귀밝이술과 부럼 깨기
대보름날 아침에 가족들이 모여서 귀가 밝아지라고 ‘귀밝이술’을 한 잔씩 마신다. 그리고 한 해 온갖 부스럼을 막는 의미로 호두나 밤 등으로 ‘부럼’을 깨서 먹는다.
3) 점치기
대보름에는 한 해의 농사와 관련된 점을 많이 본다. 우선 보름 아침에 밥을 먹고 난 뒤 밥하고 나물을 키에 담아 소 앞에다 갖다 놓고 풍흉을 점쳤다. 소가 밥부터 먹으면 그해 시절이 좋고, 나물부터 먹으면 흉년이 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고 난 뒤에 찬물부터 마시며, 짚단에 불을 붙여서 넘게 되면 여름철 모기에 뜯기지 않는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대작대기를 들고 울타리를 “텅텅” 두들기며 “우여 우여” 새 쫓는 시늉을 하는데, 그렇게 해야 새가 곡식을 먹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대보름에는 달집을 짓고서 태울 때 넘어지는 쪽을 보고 풍흉을 점쳤다. 대보름 아침에 살팍[사립문] 앞이나 마당 한 가운데 짚단을 세워 두고 불을 붙여 태운다. 그러면 그 짚단이 넘어가는 쪽으로 풍년이 든다고 한다. 달을 보고 점을 치는 경우도 있다. 노인네들은 달이 뜬 것을 보고 한 해의 날씨를 점치는데, 달이 밝고 붉으면 가물겠다고 여기며, 희미하게 구름이 낀 것처럼 보이면 비가 많이 올 것 같다고 여긴다.
3. 놀이
1) 집돌랑[지신밟기]
정초부터 집집마다 다니면서 농악을 치며 집안의 안녕과 잡귀를 몰아내는 집돌랑을 하였다. 특히 대보름날은 보다 많은 복이 들어온다고 믿어 절차에 따라 제대로 행하였다. 악양면 지역에서는 근래 들어 몇 년간 중단되어 오던 집돌랑을 다시 부활시켜 모든 집들이 참여하고 있다.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상평마을의 경우에는 농악대가 먼저 할배 당산부터 치고 할매 당산과 공동 우물을 친 다음 가가호호 순방을 한다. 마을의 제일 밑에 있는 집부터 쳐서 올라오든가 아니면 위에서부터 내리치든가 하는데 그것은 정하기 나름이다. 할배 당산은 미리 섣달 그믐날 제사를 모셨으니까 집돌랑 때는 비린내 나지 않는 깨끗한 과실에 술만 한 잔 붓고 농악을 울리며 마을의 소망을 비는 정도로 행한다. 마을 어른들의 무병장수와 주민들이 한 해 동안 다 잘 되게 해주십사 하고 빈다. 다음으로 아래 당산에 가서도 똑같이 한다. 그리고 길매구를 치며 마을의 공동 우물가에 가서 물맛이 좋도록 빈다. 그런 다음 집집이 돌면서 집돌랑을 논다.
집돌랑의 순서는 살팍→ 마당→ 안방→ 정지→ 장고방→ 천룡→ 뒤주→ 고방→ 우사 등의 순이다. 먼저 대문 앞에서 “쥔쥔 문여소 문 안 열면 갈라요.”를 외치면 주인은 문을 열어 주고 농악대를 맞이한다. 그러면 영기를 살팍 양쪽에다가 꽂아 놓고 “쥔쥔 문여소 나그네 손님 들어간다.” 하면서 집안으로 들어간다. 농악대는 마당에 들어가서 한바탕 신나게 두들긴다. 마당에서 놀면 주인은 조그만 개다리 상을 준비한다. 그 위에 물 한 중발 떠 놓고 쌀을 밥그릇에 떠서 거기에 촛불을 켠다. 거기서 절을 하고 나면 상을 옮겨 큰 방문 앞에 놓고 성주님께 고하며 악기를 두드린다. 이후 농악대는 집안 구석구석을 치면서 터를 울려 주고 복을 빈다. 보통 집주인은 정월 안택보다 집돌랑 농악을 두드리면 더 좋다고 해서 많이 하였다.
집돌랑을 돌면 집집마다 쌀이나 돈을 내놓는다. 부자들은 말에다 주고 없는 사람들은 됫박에다 주는데, 아주 없는 사람은 죽 식기[죽 그릇]에 담아 주었다. 약 30년 전까지만 해도 그것을 부대 자루에 담아 모아 공용으로 활용하였다.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상평마을은 집돌랑을 돌며 모아진 쌀이나 수익금을 어디에 쓸 것인지 미리 계획을 세운다. 마을 공동 자금으로 활용한다든지, 악기를 추가로 구입한다든지, 기타 목표를 정하여 계획대로 행하였다.
2) 쥐불놀이
하동 지역의 아이들은 정월 열사흘 날부터 쥐불놀이를 하면서 놀았다. 하동 지역에서 쥐불놀이는 ‘논두렁 불 지르기’라고도 하는데, 마을의 남자아이들이 보름 하루 전날 저녁에 논두렁을 태우며 노는 놀이이다. 일제 강점기나 해방 직후에는 달집을 다 짓고 나서 정월 열 나흗날 초저녁에 불을 많이 질렀다. 아이들끼리 “논두렁에 불 지르러 가자.”고 하면, 남의 집 대밭에 가서 대나무 조각을 구해다가 그 끝에 불을 붙이고 논두렁으로 내달렸다. 대나무 조각을 이용한 것은 불이 잘 꺼지지 않고 오래 타기 때문이다. 또 소나무 관솔에 불을 붙여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당시에는 놀다보면 무명바지 가랑이를 태우기 일쑤였다. 근래에 와서는 보통 구멍을 뚫고 손잡이용 철사를 매달아 만든 통조림 깡통을 사용한다. 그 속에 솔가지나 일반 장작을 조그맣게 쪼개서 넣고 돌리면 불이 붙는다. 불이 활활 타게 되면 그것을 논두렁에 갖다 대고 군데군데 불을 지르며 논다.
논두렁에 불을 지르는 까닭은 우선 못된 해충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 보다 아이들의 재미는 논두렁에 퍼져 가는 활기찬 불꽃을 보고 즐기는 데 있다. 보통 자기 나이 수만큼의 논두렁에 불을 붙여 지른다. 그러다 보면 그날 저녁에는 온 논두렁이 새빨갛다. 불꽃이 다 타고 나면 논두렁에 남은 불씨는 발로 비벼 끄고 깡통만 챙겨서 집으로 가져온다. 1965년에서 1970년대까지만 해도 ‘보름날 딱 그날 저녁 하루’만 논두렁에 불 지르기를 하면서 놀았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화재의 위험 때문에 점차 사라졌다가 오늘날 악양면의 경우 악양천 둑이나 대보름날 달집태우기 전에 그 주위에서 잠깐 불 깡통을 돌리는 정도로 축소되어 새로운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3) 달집태우기
달집태우기는 음력 정월 대보름날 대나무와 소나무 가지 등을 쌓아 달집을 만들어 놓고 달이 뜰 때 태우며 노는 놀이이다.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상평마을에서는 20년 전까지만 해도 당산나무가 있는 주변 못자리 논에서 대보름날 저녁 농악을 울리며 달집태우기를 했다.
달집을 만들 때는 우선 대나무를 세 개나 여섯 개를 세워 엮어서 작숫발을 만들어 세운다. 그 사이에 산에서 베어 온 소나무를 쌓아 넣고 대나무로 그 주변을 엮어 두르는데, 이때 달집의 구멍을 네 군데 만들어 그 속에 불쏘시개용 짚을 많이 집어넣는다. 대나무 꼭대기에는 아이들이 정월 내내 날렸던 연에다가 자신의 소망을 글씨로 써 매달고 액막음 또는 손막음을 하고,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은 헌옷가지를 갖다가 걸고 소망을 빈다. 달이 떠오르면 관솔가지로 불을 지피고, 불길이 타오르면 달을 보며 절을 하거나 자식들 잘 되게 해주고 소원 성취해달라고 기원한다.
현재 악양면의 경우를 보면 청년회 주최로 악양면 전체 차원에서 달집태우기를 진행하고 있다. 들판 가운데 달집을 한 군데에서만 태우고, 다양한 민속놀이와 먹을거리를 준비하여 악양면 전체 차원의 공동 행사로 치른다.
4) 줄끗기
(1) 쌍줄끗기: 악양 지역에서는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대보름날 저녁에 쌍줄끗기를 하며 놀았다. 악양 지역 전체의 사람들이 대규모로 참가하여 놀았던 쌍줄끗기의 편가르기는 정서면의 신건지 다리를 중심으로 ‘물아래’와 ‘물우’로 나눈다. 물아래는 외둔마을, 상평마을, 하평마을, 대촌마을이 해당되고, 물우는 정서마을 위쪽이 해당되었다. ‘물우’에는 청암 사람들이 붙고 ‘물아래’는 하동, 화계, 전라도 다압 사람들까지 붙다보니 물아래에서 줄 끌려고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줄은 정초부터 드리기 시작하여 정월 대보름 저녁 달 밝을 때 끗는데 보통 다음 날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줄을 만들 때는 물우는 물우대로 만들고, 물아래는 물아래대로 만든다. 정초가 되면 동네 아이들은 돌아다니면서 남의 짚을 무작정 가져오거나 하며 짚을 조금씩 모은다. 그러면 어른들이 본격적으로 짚을 모으러 나서고 줄을 만들기 시작한다. 줄을 드리는 장소는 마을 입구에 있는 큰 밭인데 여러 낱 줄을 만들어 합치다 보면 엄청날 정도로 굵게 만들어져 어른이 걸쳐 앉으면 발이 안 닿을 지경이 된다. 그때 마을 여자들은 줄 만드는데 와서 공을 들이고 절을 하며 정성을 드린다. 줄의 덩치가 커지면 어른 몇 명이 달려들어 돌리고 몸통 옆에 가닥 줄을 꽂아 단다.
줄끗기의 전초전은 아이들의 장난으로부터 시작된다. 정초부터 아이들은 오락으로 소리를 지르고 다녔다. 정월 초닷새가 지나가면 마을에서부터 「상사 소리」를 하면서 ‘물우’로 넘어간다. 어린아이들이 정초부터 부아를 돋우어 놓으면 양쪽 마을 어른들이 나서서 줄을 만들 계획과 날을 받아 가지고 줄끗기를 하게 된다. 줄끗기 약속이 되면 어른들은 하동읍이나 다압 등을 다니면서 “우리가 아무 날 줄을 끄니까 오라.”고 책명 하러 간다. 이렇게 알리고 다니면 줄끗는 날 사람들이 많이 밀려온다. 물우와 물아래의 어른들이 합의를 보면 각 구역에서 설창자가 각기 나타난다. 일종의 물주 또는 자본가로서 줄끗기를 설치하는 사람, 베푸는 사람이다. 부자들은 설창자를 보고 각지에서 찾아든다.
줄끗기는 용두머리에 장나무를 걸면 시작된다. 그때 앞에서 풍물을 치거나 춤을 추며 깃대를 들고 야단이다. 용두머리 두 개를 서로 끼워 넣고 장나무를 갖다 박는다. 이때 양쪽 편에는 깃대가 무한정 서 있고 잡아 거는 순간 징을 때린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줄끗기가 시작되고 한 아름이 넘는 두 개의 줄이 걸리면 몸줄 옆에 붙은 가닥 줄을 잡아당긴다. 그러나 신호를 하자 끌어당기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깔고 앉아 버린다. 주위의 구경꾼도 서 있지 못하고 모두 줄에 엉겨 붙는다. 용두머리 위에는 한 명의 앞소리꾼이 타고 앉는다. 앞소리꾼은 높은데 서서 아래를 보며 깃대를 흔들고 소리를 한다.
놀이가 시작되면 줄 뒤쪽에서는 설창자가 줄 끗는 사람에게 저녁으로 주먹밥을 준비해 갖다 주면서 집에 못 가도록 하거나 시간을 끌도록 주문한다. 그러다 보면 줄끗기의 승패는 당일 하루 만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틀까지 넘어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쌍줄끗기는 해방 3년 전에 중단되었고, 해방 후에는 제 각각의 마을에서 외줄끗기를 벌이게 되었다.
(2) 외줄끗기: 외줄끗기는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상평마을의 중간쯤에 있는 공동 우물과 중간 동·서로 펼쳐진 길[상골목]을 중심으로 위쪽은 웃담, 아래쪽은 아랫담으로 나누고 한 가닥의 통줄을 끗고 노는 것이다. 외줄끗기는 정월 대보름날 저녁에 달집을 태우고 나서 그 옆에서 끗고 놀았다. 옛날에는 주로 보리를 밟으며 큰 논바닥에서 많이 끗고 놀았는데, 현재는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줄끗기의 줄은 주민들이 짚을 거둬 가지고 거기서 똬리를 틀어 만든다. 새끼줄을 크게 까는 것처럼 장정 서너 명이 엉겨 붙어서 꼬아 만든다. 주로 큰 논바닥이나 타작마당에서 만들고, 나무 가지에 새끼줄을 걸어 당기면서 줄을 드린다. 줄을 넘기면서 세 사람이 줄을 꼬아 보통 50m에서 100m 정도로 만든다. 통줄이 가늘 때는 손잡이 곁줄을 만들지 않고, 굵을 때는 손이 들어갈 정도로만 새끼줄로 손잡이를 만들어 붙인다. 줄을 드릴 때는 마을 사람들이 다 달려들어 만들고, 줄을 끌 때만 편을 가른다.
줄끗기의 편가르기는 상골목을 중심으로 나누기도 하고 반별로 나누기도 하였다. 반별로 할 때는 1반, 2반, 3반이 같은 편이고 4반, 5반, 6반이 상대편이 된다. 통줄 가운데 깃대[천]를 중간에 매달아 두고 심판관이 거기에 올라서서 징을 치면 줄끗기가 시작된다. 통줄의 중심부에는 사람이 앉아 탈 정도로 별도의 줄을 짚으로 꼬아서 도리 방석만 하게 발판[용두머리]을 만들고 손잡이를 붙여 놓았다. 여기서 선소리꾼은 팽팽히 줄이 뜬 상태에서 올라 앉아 징을 치고 「줄멕이는 소리」도 한다.
줄끗기의 승패가 결정이 날 때쯤이면 진 사람들은 징을 뺏어 훼방을 놓고 세력 다툼을 하게 된다. 진 쪽에서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게 소리꾼의 징을 빼앗아서 방해를 한다. 줄끗기는 한 번 만에 승패가 갈리고 징을 치는 순간 결정이 나기 때문에 끌려가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따라서 선소리꾼은 징을 뺏기지 않을 정도로 아주 힘이 세고 키가 큰 사람이 맡는다. 선소리꾼의 「앞멕임 소리」와 줄꾼들의 「뒷소리」는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이어진다. 줄끗기가 끝난 뒤 놀다 남은 통줄은 소 키우는 사람이 가져다가 잘게 쓸어 사료로 쓴다. 짚이 모자라는 사람은 거름용으로 가져간다. 그러나 현재 상평마을에서는 외줄끗기의 전승마저 단절되어 대보름이 되어도 놀지 않는다.
4. 시절 음식
하동 지역에서 대보름날이 되면 시절 음식으로 찰밥이나 나물을 해먹었다. 오곡을 섞어 만든 찰밥은 근년에 와서는 돈부[콩]와 밤, 서숙 등의 곡물을 넣어서 해먹기도 했다. 보름 음식은 설날 음식과 다르게 나물 종류가 많고 개운한 국을 끓여 먹는다. 나물 종류로는 토란 잎사귀나 고사리, 도라지, 무채, 콩나물 등으로 만들고, 국은 명태국, 개발국, 깨국 등을 끓였는데 어떠한 종류든지 특별히 가리지 않고 만들어 먹었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하동 지역에서 정월 대보름은 어느 세시보다도 크게 쳤으며 잘 쇠었고, 특히 놀이가 풍부하였다. 보름날에 달집을 세워서 태우고, 아래·웃담으로 나누어 줄끗기를 하면서 액막이와 기원 행사를 하였다. 또한 마을의 아이들은 쥐불놀이를 하고 어른들은 농악을 치며 집집마다 다니면서 터를 울려 주고 복을 비는 집돌랑을 했다. 이때 혹시 우물 앞으로 초상이나 행상이 지나갈 적에는 멍석이나 덕석 같은 것으로 우물을 덮었고, 그런 후에 샘굿을 치고 집돌랑을 돌았다. 옛날에 상주 집은 복을 삼 년 입었기 때문에 집돌랑은 안 쳤다고 한다.
정월 대보름 저녁이 되면 보름달이 잘 떠오르는 것을 먼저 보기 위해 앞다투어 달 이 뜨는 곳으로 나아갔다. 달을 먼저 보게 되면 소원하는 바가 이루어진다고 하여 높은 곳으로 올라가 절을 하며 비손을 행하였다. 달집태우기를 할 때면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은 속옷을 내걸어 태우고 불이 다 꺼질 때까지 주변을 돌면서 자식들을 위해 비손을 하였다. 한편 노인들은 달집이 타면서 넘어갈 때 자빠지는 쪽으로는 물이 져서 곡식을 못 먹는다고 하면서 점을 쳤다. 물이 범람하여 헛물이 들면 다 지어 놓은 농작물을 못 먹으니까 애가 터져 그런 점을 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