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1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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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炳注 |
영어음역 | Lee Byeongju |
이칭/별칭 | 나림(那林)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옥정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현덕 |
출생 시기/일시 | 1921년 3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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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27년 |
수학 시기/일시 | 1936년 |
수학 시기/일시 | 1941년 4월 |
활동 시기/일시 | 1943년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
활동 시기/일시 | 1946년 |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
활동 시기/일시 | 1951년 |
활동 시기/일시 | 1952년 |
활동 시기/일시 | 1957년 8월 |
활동 시기/일시 | 1958년 |
활동 시기/일시 | 1961년 |
활동 시기/일시 | 1963년 |
활동 시기/일시 | 1965년 |
활동 시기/일시 | 1972년 |
몰년 시기/일시 | 1992년 4월 3일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옥정리 |
묘소 |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금곡리 |
기념관 |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이명산 |
성격 | 소설가 |
성별 | 남 |
본관 | 합천 |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출신의 소설가.
[개설]
이병주(李炳注)의 본관은 합천(陜川). 호는 나림(那林)이다. 월간 『마당』[1984년 11월호]에서 이병주는 ‘나림’은 ‘어떤 숲’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1921년 3월 16일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옥정리 안남골[安南谷]에서 아버지 이세식(李世植)과 어머니 김수조(金守祚) 사이에서 3남 1녀 중 큰아들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 형제들이 ‘8형제 8천석 8진사’로 이름날 정도로 선대가 하동의 유지였고, 아버지는 정미소와 양조장을 운영하였다.
해방 후 진주농림중학교 교사, 진주농과대학과 해인대학 교수, 부산 『국제신보』 주필 등으로 활동하다 5·16 쿠데타 때 필화를 입어 수감되었다. 1965년 「소설 알렉산드리아」로 등단하여, 『관부연락선』·『지리산』·『낙엽』·『행복어사전』·『그해 오월』·『비창』·『산하』 등 80여 권의 소설을 창작하였다. 주로 대하 역사 소설을 집필하여 ‘한국의 발자크’라 불렸다.
경상남도 고성군에 사는 이용호(李龍浩)의 큰딸 이점휘(李點輝)와 1943년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이권기(李權基)[경성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와 딸 이서영(李瑞英)을 두었다.
[활동 사항]
1. 발자크를 멘토로 삼던 학창시절
1927년 4년제 북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을 했고, 1931년 양보공립보통학교 5학년으로 편입하여 1933년 졸업을 했다. 5년제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1938년 진주공립중학교, 1950년 진주고등학교로 개칭]에 진학할 생각이었으나, 고등보통학교에 가면 중부(仲父) 이홍식(李弘植)처럼 사상운동이나 독립운동에 빠져 집안에 폐를 끼칠 수 있다는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3년간 독학하였다. 1936년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5년제 진주공립농업학교[1946년 진주농림중학교, 1951년 진주농림고등학교로 개칭, 1993년 진주산업대학교로 승격, 2011년 경남과학기술대학교로 개명]에 입학했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다, 1940년 일본인 교사를 폭행하고 퇴학을 당했다.
그 해 일본 교토[京都]로 건너가 전검(專檢)[전문학교 입학 자격 검정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1941년 4월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문예과에 입학하여 2년 6개월간 문학과 예술에 심취하였다. 그 시절 자신의 하숙방 책상 앞에 “나폴레옹 앞엔 알프스가 있고, 내 앞엔 발자크가 있다.”는 글을 붙여 놓고, ‘소설에 의한 사회사’를 표방한 프랑스 소설가 발자크(Honore de Balzac)를 멘토로 삼았다. 1943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불문과에 입학했으나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중국 쑤저우[蘇州]의 일본군 제60사단 치중대(輜重隊)[보급·수송대]에서 군마(軍馬)를 사육했다. 1945년 해방 직후 상하이[上海]에 머물면서 첫 작품인 희곡 「유맹-나라를 잃은 사람들」을 집필하였다.
2. 해방 뒤 교수로서의 활동
1946년 3월 상하이에서 귀국한 후 그 해 9월 이병주는 모교인 진주농림중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4학년[고급부 1학년] 영어와 5학년[고급부 2학년] 윤리[철학]를 담당하였다. 이 시절, 좌익인 학동[한국학생동맹]에게는 ‘반동’으로, 우익인 학련[전국학생총연맹]에게는 ‘회색분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1948년 진주농과대학[현 경상대학교]이 개교하자 영어·불어·철학 등을 강의했다. 1949년 진주농과대학 교지 『개척자(開拓者)』를 창간하고 편집을 맡았다. 또한 개교 1주년 기념식에서 오스카 와일드(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의 「살로메(Salomé)」를 연출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 정치보위부에 붙들려 연극동맹[문예선전대] 책임자로 부역하였다. 1950년 9월 진주 수복 후 진주농과대학 조교수직을 사임하였다. 부역 문제로 부산으로 떠났다가 10월 진주경찰서에 자수하여 불기소 처분을 받았고, 12월 미군 CIC[방첩대]에 연행되어 구속 10일 만에 풀려났다.
1951년 1월 하동으로 돌아온 이병주는 가업인 양조장 일을 돌보다가 5월 해인사에 입산하여 독서와 음주로 소일하였다. 그러던 중 최범술(崔凡述) 재단의 국민대학[신익희(申翼熙) 재단의 국민대학과 결별한 후 독자 설립]이 1952년 3월 해인사로 옮겨 와 ‘해인대학’[1971년 마산대학, 1982년 경남대학교로 개명]으로 문을 열자 출강하였다.
1952년 7월 빨치산이 해인사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 사건 후 해인대학이 진주시 강남동으로 이전하였다. 1953년 진주 해인대학에서 분규가 일어나 최범술 학장의 강남[현 천전초등학교 자리] 해인대학과 유엽(柳葉) 학장의 강북[비봉산 비봉루] 해인대학으로 나누어졌는데, 이병주는 강북 해인대학에 속하였다. 1954년 해인대학 재직 중, 고향 하동에서 제3대 민의원[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12명 중 3위로 낙선하였다. 이병주는 마산 해인대학 시절 문과 주임교수, 서무과장, 교내 신문 『해인대학보』의 주간을 맡는 등 교수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3. 언론인으로의 활동과 소설 집필
1957년 8월 『부산일보』에 장편 『내일 없는 그날』을 이듬해 2월까지 연재하였다. 1958년 부산 『국제신보』 상임 논설위원이 되어 언론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동아대학교에 출강하여 영어와 불어를 강의하였다. 1959년 『국제신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 되었다. 1960년 4·19 혁명 후 하동에서 제5대 민의원[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9명 중 3위로 낙선하였다. 「조국의 부재」[1960년 12월], 「통일에 민족 역량을 총집결하자」[1961년 1월] 등의 논설을 썼다가 1961년 5·16 쿠데타 세력에 의해 필화를 입었다. 혁명재판소에서 반국가 행위를 했다는 명목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부산교도소에서 2년 7개월간 복역했다.
1963년 12월 특사로 출감한 뒤 서울에서 폴리에틸렌[비닐] 사업을 시작했으나 실패하였다. 1965년 『국제신보』 논설위원이 되어, 그 해 월간 『세대』에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발표하였다. 이 중편 소설이 이병주의 공인된 데뷔작이다. 1966년에는 조립 주택 사업을 하다가 파산하였다. 그 후 27년 동안 200자 원고지 총 10만여 매의 원고를 신들린 듯이 집필해 나갔는데, 소설·수필·칼럼 등 장르도 다양했다. 단행본으로 나온 책만도 80여 권이나 된다. 이 중 대하 장편 소설만 35편에 이르러, 일부 작품은 태작(駄作)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1992년 4월 3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지병인 폐암으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1. 작품
작품과 작품집으로 1945년 「유맹-나라를 잃은 사람들」, 1959년 『내일 없는 그날』, 1965년 「소설 알렉산드리아」, 1966년 「매화나무의 인과[天網]」, 1968년 「마술사」·『관부연락선』, 1969년 「쥘부채」·「배신의 강」, 1970년 『망향』·『여인의 백야』, 1971년 「패자의 관」·『화원의 사상』·『언제나 그 은하를』, 1972년 「예낭풍물지」·「변명」·「목격자」·『지리산』·『망각의 화원』, 1973년 『백지의 유혹』, 1974년 「겨울밤」·「칸나·X·타나토스」·『낙엽』·『산하』, 1975년 「중랑교」·「내 마음은 돌이 아니다」·『사랑을 위한 독백』, 1976년 「여사록」·「철학적 살인」·「이사벨라의 행방」·「망명의 늪」·『행복어사전』, 1977년 「정학준」·「삐에로와 국화」·『성-그 빛과 그늘』·『바람과 구름과 비』, 1978년 「계절은 그때 끝났다」·「추풍사」·『허상과 장미』·『미와 진실의 그림자』·『사랑받는 이브의 초상』·『1979년』·『인과의 화원』, 1979년 「어느 독신녀」·「서울은 천국」·『황백의 문』·『허망과 진실』·『바람소리, 발소리, 목소리』, 1980년 「세우지 않은 비명」·「8월의 사상」·『서울의 천국』·『코스모스 시첩』·『역성의 풍·화산의 월』·『아담과 이브의 합창』, 1981년 「피려다 만 꽃」·「거년의 곡」·「허망의 정열」·『풍설』·『서울 버마재비』·『당신의 성좌』·『황혼의 시』, 1982년 「빈영출」·「세르게이 홍」·『그해 오월』·『무지개 연구』·『미완의 극』·『공산주의의 허상과 실상』·『나 모두 용서하리라』·『현대를 살기 위한 사색』·『강변이야기』, 1983년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소설 이용구」·「우아한 집념」·「박사상회」·「백로선생」·「팔만대장경」·『자아와 세계의 만남』, 1984년 「강기완」·「약과 독」·『비창』·『황혼』·『여로의 끝』·『길 따라 발 따라』·『남로당』·『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1985년 『니르바나의 꽃』·『강물이 내 가슴을 쳐도』·『꽃의 이름을 물었더니』·『무지개 사냥』·『여체미학·샘』·『생각을 가다듬고』·『지오콘다의 미소』·『청사에 얽힌 홍사』·『악녀를 위하여』, 1986년 「그들의 향연」·「어느 낙일」·「산무덤」·『사상의 빛과 그늘』·『소설 장자』, 1987년 『소설 일본제국』·『운명의 덫』·『남과 여-에로스 문화사』·『허와 실의 인간학』, 1988년 『유성의 부』·『그를 버린 여인』·『잃어버린 시간을 위한 문학적 기행』·『행복한 이브의 초상』·『산을 생각한다』·『황금의 탑』, 1989년 『허균』·『포은 정몽주』·『유성의 부』·『내일 없는 그날』·『젊음은 항상 가꾸는 것』, 1990년 『그를 버린 여인』·『꽃이 된 여인의 그늘에서』·『그대를 위한 종소리』, 1991년 『대통령들의 초상』·『달빛 서울』, 1993년 유작 『타인의 숲』·『소설 정도전』, 2009년 미완성 유작 『별이 차가운 밤이면』 등이 있다.
2. 이병주 작품에 대한 평가
이병주는 시대적으로는 일제 강점기와 태평양전쟁, 해방 후 좌·우익의 대립과 6·25 전쟁, 4·19 혁명과 5·16 쿠데타 등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었고, 개인적으로는 일본 유학, 학도병, 중등학교 교사, 연극동맹 부역, 해인사 입산, 대학 강사·교수, 국회의원 출마, 신문사 논설위원·주필·편집국장, 형무소 수감, 사업가에 이르기까지 소설보다 더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다. 그리고 진보와 보수, 노동자에서 대통령까지 이념과 계층을 초월한 다양한 교유, 동서와 고금을 아우르는 박학다식, 방대한 장서와 철학적 사유, 세련된 교양과 여성 편력 등도 그의 작품에 자양분이 되었다. 그러나 이병주의 이러한 삶의 이력과 특징은 그의 정체성에 대한 평가를 극명하게 나누게 하기도 하였다.
이병주는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는 자신의 글처럼, ‘기록자로서의 소설가’, ‘증언자로서의 소설가’를 지향했다. 그러기에 대하 역사 소설을 주로 집필하여 ‘한국의 발자크’란 칭호를 들었다. 흔히 이병주의 문학을 ‘소설로 읽는 한국 현대사’라고 하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그는 한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역사와 민족의 비극에 고뇌했고, 그 아픔을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이병주의 작품은 탄탄한 이야기 전개와 구성으로 소설문학 본연의 서사성을 이상적으로 구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3. 이병주의 하동 사랑
이병주는 1987년 월간 『한국인』에 게재한 「지리산 남쪽에 펼쳐진 섬진강 포구」에서 고향인 하동군 북천면에 대한 향수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봄이 되어도 꽃 같은 꽃도 피지 않는다. 산 이곳저곳, 들 이곳저곳에 꽃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 산만해서 꽃다운 정서가 풍겨 날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적다운 고적도 없다. 유서를 지닌 곳도 없다. 조그마한 암자는 있었지만 사찰다운 사찰도 없다. 그야말로 벽촌이다. 두 갈래 시내가 있긴 있는데 흔히들 말하는 전설적인 용소(龍沼)라는 것도 없다. 딴 곳에서 그처럼 흔한 용 한 마리가 우리 고장엔 없는 것이다. …… 이처럼 쓰고 있으면 무미건조할 뿐이고 사실 그러한데 어째서 고향이 그토록 그리우니 모를 일이다. 들을 누비는 길, 산을 기어오른 오솔길, 병풍처럼 둘러친 산의 능선, 아니 풀 한 포기, 돌 하나까지 안타까우리만큼 그리운 것이다.”
평소 이병주는 하동 출신 남대우가 작사한 「하동포구 팔십 리」를 즐겨 불렀다고 한다. “하동포구 팔십 리에 물새가 울고/ 하동포구 팔십 리에 달이 뜹니다”로 시작되는 이 노래에 대해 이병주는 「지리산 남쪽에 펼쳐진 섬진강 포구」에서 “철이 든 하동 사람으로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고향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향우회를 비롯하여 하동 출신의 사람들이 술자리를 가졌다 하면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러면 제창이 된다.”라고 하였다. 이병주는 그만큼 고향 하동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관부연락선』·『지리산』 등 그의 작품 곳곳에서 ‘하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금곡리 남한강공원묘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낙엽』으로 한국문학작가상, 같은 해 『망명의 늪』으로 한국창작문학상, 1984년 『비창』으로 한국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002년 섬진강 변 오룡정(五龍亭)에 나림 이병주문학비가 세워졌다. 이 문학비에는 『산하』의 유명한 아포리즘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이병주가 만년에 즐겨 찾았던 북한산 국립공원에는 그의 수필집 『산을 생각한다』에 수록된 「북한산 찬가」의 일부를 새긴 시비 ‘북한산 찬가’가 세워져 있다.
2001년 이병주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하동군 기관장들을 주축으로 결성되었고, 2002년 유족들이 이병주의 장서 1만 4467권을 그가 재직했던 진주 경상대학교에 기증하여, 현재 경상대학교 중앙도서관에 ‘나림문고(那林文庫)’로 소장되어 있다. 2002년 나림 이병주 선생 기념 사업회가 발족되어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이병주 문학제’를 하동에서 개최하였다. 2005년에는 전국 규모의 이병주 기념 사업회가 발기되어 2007년부터 ‘이병주 하동 국제 문학제’를 개최하고 있다. 2008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이명산(理明山) 자락에 이병주 문학관이 개관되었고, ‘이병주 국제 문학상’도 제정되었다. 매년 열리는 이병주 하동 국제 문학제에서는 추모식, 국제 문학 심포지엄, 문학 강연회, 전국 학생 백일장, 문학의 밤, 국제 문학상 시상식 등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