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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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淇範 |
영어음역 | Gim Gibeom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평촌리 285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양판석 |
출생 시기/일시 | 1885년 9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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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8일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16일 |
몰년 시기/일시 | 1951년 7월 6일 |
추모 시기/일시 | 1994년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평촌리 285 |
묘소 |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면 두명리 |
기념물 |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상이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하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아버지는 김종련(金鍾鍊)[1861~1894]이고, 어머니는 정계언(鄭桂彦)이다. 아버지는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을 때 하동 지역에서 활동하다 붙잡혀 경상남도 감영에서 효수를 당하였고, 형인 김기완(金淇完)도 여러 방법으로 항일 투쟁을 한 인물이다. 부인은 조묵계로,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김기범(金淇範)은 1885년 9월 25일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평촌리 285번지 버드리[반월]에서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4월 7일 김기범은 청암면 평촌리 정신교(鄭信敎)의 집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정재옥(鄭在玉)[1893~1944] 등과 함께 마을 사람들을 규합하여 독립 만세를 외칠 것을 계획하였다. 그날 밤 태극기를 동네 김종을의 집 마당에 세운 뒤,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다음날 독립 만세를 부르는 취지에 대해 설명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여 군중이 모일 수 있도록 하였다.
4월 8일 오후 8시경 정재옥 등 50~60명이 모인 자리에서 김기범이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다. 김기범은 청암면장 화창조(化昌兆)에게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기를 강요하는 등 평촌리 광장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었다. 이후 김기범은 그 해 5월 16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대구감옥으로 이송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김기범은 형과 함께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1885~1943]가 운영하는 백산상회의 하동 지점격인 남일상회를 만들어 무역업을 하면서 독립 자금을 조달하였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 진주로 이사했다가 다시 하동읍 북쪽 두곡리에 와서 살았다. 1951년 7월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에서 77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묘소]
묘소는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면 두명리[당시 양산군 정관면 두명리] 백운공원묘지 내에 있다.
[상훈과 추모]
청암면 사람들로 구성된 청암정우회의 하복도와 하태현이 중심이 되어 범죄인 명부를 발굴하고 재판 원문을 찾아 증거로 제시하여 포상 신청을 하였고, 그 결과 1994년 정부에서도 그의 업적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그 후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서부 경상남도 지역에 묻혀 있는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청암면에서 독립 유공자와 애국지사를 추모하는 기념비 건립이 진행되어, 김기범·정재옥·정남시(鄭南時) 3인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가 세워졌다. 1995년에 건립된 이 비는 현재 하동군 청암면 상이리 호숫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