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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섬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437
한자 鄭暹基
영어음역 Jeong Seomgi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장암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양판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5년 12월 26일연표보기
수학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수학 시기/일시 1916년 3월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17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3일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22년연표보기
활동 시기/일시 1927년연표보기
몰년 시기/일시 1954년 7월 24일연표보기
추모 시기/일시 1992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장암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신간회 하동지회 회원

[정의]

일제 강점기 하동 출신의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

[개설]

정섬기(鄭暹基)[1895~1954]는 영일 정씨로 아버지는 정환칠(鄭煥七), 어머니는 김관동(金冠東)이다. 정섬기는 1895년 12월 26일 하동군 양보면 장암리 600번지에서 태어나 1919년 하동읍 만세운동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1954년 7월 24일 별세하였다. 부인은 정양남이며, 그 사이에 2남을 두었다.

[활동 사항]

정섬기는 선조인 정몽주(鄭夢周)를 모신 재각에 건립된 하동군 양보면 장암리 일진학교(日進學校)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1914년 진주농업학교에 진학하여 1916년 3월 졸업한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22세 때인 1917년부터 일진학교에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충효 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19년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하동에서는 3월 18일 하동읍에서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다. 정섬기는 이때 입수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바탕으로, 정성기(鄭成基)[1886~1943], 이경호(李璟鎬)[1890~1920] 및 정세기(鄭世基)[1879~1981], 정이백(鄭移伯)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태극기 10여 기를 제작하여 거사를 준비하였다.

정섬기는 3월 23일 하동읍 장날에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800여 명의 군중과 더불어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어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진주감옥에서 온갖 고문을 받고 9월 석방되었으나, 2년여를 고문 후유증과 병치레로 보냈다.

1920년 4월 창단된 하동청년회는 1922년 11월 26일 임시 총회에서 정섬기를 평의원으로 선임하였고, 여기에서 정섬기는 애국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청년회의 벽보 신문의 편집을 책임졌다. 1927년 10월 20일 신간회 하동지회가 조직되어 항일 활동을 할 때도 정섬기는 일을 도맡아 하며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고, 군자금을 모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보내기도 하였다.

정섬기는 당시 하동공립보통학교 교원을 하려 하였으나, 항일 투쟁 경력이 문제가 되어 4개월 만에 사퇴하였다. 주위 사람들이 애석해해도 “민족과 나라를 위해 백성의 한 사람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고, 다른 이들도 마음은 다 같을 것이다”라면서 출세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으며, 농사를 짓고 학생들을 지도하며 여생을 보냈다.

[상훈과 추모]

1992년 정부에서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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