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6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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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七佛寺影池 |
영어의미역 | Shadow Pond of Chilbulsa Tampl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1605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강정화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8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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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1605 |
성격 | 연못 |
관련 인물 | 김수로왕(金首露王)|허황후|김수로왕의 일곱 왕자 |
소유자 | 칠불사 |
관리자 | 칠불사 |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칠불사에 부속된 연못.
[개설]
칠불사(七佛寺)는 약 1세기경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일곱 왕자가 칠불사에서 수도한 지 2년 만에 성불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김수로왕과 허황후는 일곱 아들이 수도하여 성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보고 싶은 마음에 칠불사를 찾아가 만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불법이 심하여 사찰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할 뿐더러 만날 수도 없었으며, 칠불이 부모를 만나고자 하지도 않았다.
몇 날을 기다린 허황후는 아들의 얼굴만이라도 보기를 청하자, 일곱 아들은 직접 만날 수는 없고 사찰 앞에 있는 연못에 그림자를 비추어 어머니 마음을 위로하였다. 그래서 칠불의 그림자가 비친 연못이라 하여 ‘영지(影池)’라 부르게 되었다. 김수로왕이 머물렀던 마을은 ‘범왕촌(梵王村)’이라 하였는데, 범왕촌은 현재 하동군 화개면의 범왕리(凡王里)가 되었으며, 허황후가 머문 곳은 ‘대비촌(大妃村)’이라 하여 현재 대비리(大比里)라 부른다고 전한다.
[건립 경위]
칠불사의 창건과 관련한 여러 기록 가운데 허황후와 일곱 왕자에 얽힌 일화가 가장 많이 채택되고 있는 점에 의거하여 살펴본다면, 칠불사 영지(七佛寺影池)는 삼국 시대에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칠불사가 수도승의 참선 도량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칠불사 영지 또한 명맥을 유지해 왔다. 조선 시대 선비들의 하동 청학동 유람에도 자주 등장하는 유적 중 하나이다.
현재의 칠불사는 1948년 여수 순천 10·19 사건 때 국군에 의해 전소되어 그 터만 남아 오다가 1982년에 복원한 것으로, 칠불사 내 승려에 의하면 칠불사 영지는 본래의 자리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개항기의 학자 송병선(宋秉璿)[1836~1905]은 1879년(고종 16) 8월 1일부터 8월 9일까지 청학동과 천왕봉을 유람하였는데, 이때 지은 「두류산기(頭流山記)」에 “문루의 현판에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이라 적혀 있었다. 절의 앞쪽 조금 떨어진 곳에 작은 연못을 파서 ‘영지(影池)’라 이름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현재의 칠불사 영지는 제자리에 복원된 셈이다.
[위치]
현 칠불사는 지리산[1,915m] 반야봉 해발 800m 고지에 자리한 사찰로, 하동 쌍계사(雙磎寺)를 지나 신흥동 계곡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약 5㎞를 오르면 나타난다. 칠불사 영지는 칠불사 입구 오른쪽에 있다. 칠불사 영지에서 150m 올라가면 칠불사 입구인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이란 현판이 붙은 2층 누각 앞에 닿는다.
[형태]
칠불사 창건 당시의 원형은 알 수 없으나, 현재는 둥근 모양의 연못이다.
[현황]
2011년 현재 칠불사 영지의 소유자 및 관리자는 칠불사이다.
[의의와 평가]
칠불사는 지리산 권역에 존재하는 사찰로서 그 역사와 문헌 등으로 연구 가치가 높은 절이다. 뿐만 아니라 칠불사는 조선 시대 선비들의 지리산 유람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동군 화개를 통해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어가는 유람자들은 대개 쌍계사와 불일암(佛日庵) 일대와 신흥동 일대를 유람하고 칠불사를 거쳐 천왕봉으로 향하였으며, 천왕봉에서 하산하는 유람자 또한 같은 코스로 하산하였다. 따라서 칠불사 영지는 칠불사 아자방(七佛寺 亞字旁) 등과 함께 자주 거론되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