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806 |
---|---|
한자 | 先賢-河東遊覽 |
영어의미역 | Ancient Sages' Sightseeing of Hado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강정화 |
[개설]
남주헌(南周獻)[1769~1821]은 함양군수로 재직하던 1807년(순조 7) 3월, 당시 경상관찰사 윤광안(尹光顔), 진주목사 이낙수(李洛秀), 산청현감 정유순(鄭有淳)과 함께 하동의 쌍계동(雙溪洞)과 삼신동(三神洞)을 유람하였다. 경상감사의 행차였던 만큼 유람 행렬이나 그들을 접대하는 관할 지역의 예우 또한 극치를 이루었다. 그의 유람은 아마도 현재까지 발굴된 100여 편의 지리산 유람록 가운데 가장 화려하면서도 많은 인원이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남주헌 일행은 배 두 척을 묶어 화려하게 장식한 유람선을 타고서 섬진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화개 섬진나루에 닿았다. 그들의 배에는 악공과 각 고을에서 차출된 요리사 등 거의 300~400명과 하인까지 해서 1,000여 명이 타고 있었다. 마침 나루터에 장이 서는 날이어서 남녀노소가 빽빽이 나와 이들을 별세계에서 온 신선처럼 바라보았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돛을 펼치고 북적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것도 일대 장관의 하나였다.
화개장은 영남 하동과 호남 구례의 온갖 물산이 모여 활발한 유통이 이루어지던 곳으로, 지방 고을의 장터치고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였다. 남주헌 일행은 민생을 돌보는 관찰사와 수령이었으니 민간의 풍속을 이처럼 가까이서 볼 기회가 드물었을 것이고, 따라서 온갖 인물군상(人物群像)이 다 모인 그날의 장터가 이채롭게 보였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평소 보지 못한 색다른 구경거리를 즐기기라도 하듯, 네 사람을 신선인 양 신기하게 바라보는 장날 구경꾼들의 그 눈빛을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왜 하동 유람인가]
조선 시대 선비들의 지리산 유람은 대략 두 가지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유람의 정점인 지리산 천왕봉을 목적지로 삼은 경우로, 주로 천왕봉에 올라 공자가 “태산에 올라 천하를 작게 여긴다”고 한 기분을 만끽하고, 나아가 일출 광경을 보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것이 그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쌍계사·불일암 등 주로 하동 화개동과 삼신동 방면을 유람하는 경우인데, 현실과 이상이 괴리되었을 때 불편한 심기를 달래기 위해 이상향으로 인식되어 온 곳들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이러한 지리산 유람의 목적은 100여 편의 지리산 유람록에 나타난 유람 코스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의 하동 유람은 바로 지리산 화개동과 삼신동으로의 유람이었던 셈이다.
조선 시대 선비들의 하동 유람은 하동의 화개동천 불일폭포 주변으로 일관되게 나타난다. 그 공간적 범위를 구체화한다면 불일암과 불일폭포 일대를 중심으로 하되 쌍계사 주변과 신흥사가 있었던 삼신동 계곡까지 아우르며, 여기서 외연을 확대한다면 그 위쪽의 칠불사까지도 포함시킬 수 있다. 이곳은 입지 조건이 중국의 무릉도원과 흡사하여 청학동으로 일컬어지곤 했는데, 그곳에는 빼어난 절경뿐만 아니라 불일암에서 공부하던 최치원(崔致遠)이 신선이 되어 날아갔다는 전설과 함께 한 쌍의 청학도 깃들어 있어 무릉도원의 입지 조건을 모두 갖춘 셈이었다.
[하동 유람의 원조, 최치원]
하동 화개동 일대가 선비들의 유람 명승으로 인식된 데에는 신라 최치원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최치원은 통일신라 말기 당나라로 유학하여 문명을 떨친 후 새로운 희망을 품고 귀국했으나, 그를 맞이한 건 변함없는 신분제의 한계와 이미 말기적인 폐단을 드러내고 있는 현실이었다. 세상에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음을 알고 그는 결국 방랑으로 세월을 일관하였고, 그런 연유로 전국에서 절경으로 이름난 곳이라면 그의 발자취 하나쯤 남아 전하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런 그가 선경(仙境)인 양 아름다운 이 화개동의 경관을 그냥 지나쳤을 리 없다. 더구나 쌍계사와 불일암 등의 고찰은 그의 발길을 멈추기에 충분했으리라.
고운천재인(孤雲千載人)[고운은 천 년 전 사람]
연형이기학(鍊形已騎鶴)[수련하여 학을 타고 갔다지]
쌍계공구적(雙溪空舊蹟)[쌍계에는 옛 자취만 남아 있고]
백운미동학(白雲迷洞壑)[흰 구름 골짜기에 자욱하여라]
미생앙고풍(微生仰高風)[미미한 후생 고풍을 우러르니]
향왕의수수(響往意數數)[끌리는 마음 자주 일어나네]
낭영류수시(朗詠流水詩)[공의 유수시를 읊조려 보니]
일기압횡삭(逸氣壓橫槊)[빼어난 기상은 조조(曹操)보다 낫네]
안득사분효(安得謝紛囂)[어찌하면 번잡함을 떨쳐 버리고]
공군유벽락(共君遊碧落)[공과 푸르른 하늘에서 놀아 볼까]
위 시는 조선 시대 유학자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1527~1572]이 화개동천을 유람하고 지은 한시이다. 7구의 ‘유수시(流水詩)’는 ‘짐짓 흐르는 물로 산을 둘러치게 했네’라고 읊은 최치원의 시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을 가리킨다. 기대승은 지리산 천왕봉과 청학동을 두루 유람했는데, 그 역시 현실에서의 번잡하고 힘든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하동 화개동에서 신선이 되어 날아간 최치원을 찾고, 그를 통해 선경의 세계로 가고픈 동경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 화개동에서 최치원의 발자취를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쌍계사 입구에 버티고 있는 쌍계석문 석각을 비롯해, 지금도 쌍계사 대웅전 뜰에 위풍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는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가 그의 필체이고, 지금은 없어졌으나 조선 후기까지도 쌍계사 고운영당(孤雲影堂)에는 최치원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었다고 전한다.
또 불일암은 어떤가. 청파(靑坡) 이육(李陸)[1438~1498]의 유람록에 의하면, 불일폭포 아래에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두 못이 있는데, 하나는 용추(龍湫)라 하고 다른 하나는 학연(鶴淵)이라 불렀다. 속설에 “최치원이 이곳에서 책을 읽으면 신령스런 용이 그때마다 나와 그 소리를 들었고, 학도 그 소리에 맞춰 공중을 날며 춤을 추었다.”고 하였으니, 불일암 일대는 온통 최치원의 일화 일색이다.
그 외에도 신흥동 계곡 초입 바위에 새겨진 ‘삼신동(三神洞)’이란 세 글자 석각과 신흥사 앞 계곡 바위에 새겨진 ‘세이암(洗耳嵒)’이란 세 글자 또한 최치원의 필적으로 전한다. 현재 신흥사 터에는 화개초등학교 왕성분교장이 자리하는데, 그 교문 앞에는 지금도 세월의 깊이가 느껴지는 큰 푸조나무가 가지를 늘어뜨린 채 지나는 이들에게 그늘과 휴식을 제공하고 있다. 최치원이 꽂은 지팡이에서 살아난 것이라고 그 앞에 세워진 안내판은 전하고 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이 지리산 계곡 중 가장 절경으로 칭찬했던 곳도 바로 이곳이다. 계곡의 바위 하나, 귀퉁이 하나도 최치원의 일화와 전설이 빠지지 않은 곳이 바로 이 화개동과 삼신동이다. 사계절 어느 때든 이곳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모두가 최치원이 되어 청학을 타고 날아갈 것만 같은 아름다운 착각에 빠지게 된다.
[화개동천 찾아가는 길]
하동 화개동천을 찾아가는 선현들의 유람은 다소 순서의 차이가 있으나 대개 ‘쌍계사→불일암→불일폭포→삼신동→신흥사→칠불암’ 일대로 나타난다. 조선 시대 초창기 유람록에는 주로 신흥사까지 거론되고 칠불사가 보이지 않는 데 비해, 시대가 내려올수록 칠불사를 경유하는 이가 많이 나타난다.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에 있는 칠불사는 지리산 반야봉 아래 800m 높이에 위치하며, 전해 오는 아름다운 일화와 유적이 많다. 본래 ‘구름 위의 집’이란 뜻의 ‘운상원(雲上院)’으로 불렸는데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출가해 모두 성불했다고 하여 칠불사로 절 이름을 바꾼 일화부터 거문고의 신선 옥보고(玉寶高) 이야기, 한번 불을 지피면 49일이나 열이 식지 않는다는 아자방(亞字房)의 온돌, 아들에 대한 진한 모정을 담은 영지(影池) 일화 등이 유명하다. 이런 여러 일화와 오랜 역사를 지닌 칠불사는 청학동을 찾아 이곳으로 유람하는 자라면 반드시 들르는 코스였다.
대부분 화개를 지나 신흥사나 칠불사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 나오는 코스이나, 칠불사에서 반야봉을 거쳐 노고단으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보림(李寶林)[1903~1974]은 구례 화엄사에서 노고단을 거쳐 반야봉에 올랐다가 칠불사로 내려왔는데, 아마도 삼도봉을 지나 화개재를 거쳐 목통골을 따라 칠불사로 들어간 듯하다. 이 등산로는 산세가 험악하고 위험하여 지금은 통행이 금지되었다.
화개동 일대가 최종 목적지라면, 이곳으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반드시 경유하는 곳이 화개이다. 유람자가 화개에 이르는 과정은 두 가지다. 남원·순창이나 곡성에서 출발하는 유람자는 구례를 거쳐 화개로 진입했고, 합천·진주에서 들어가는 유람자는 하동과 악양을 경유하여 화개로 진입하였다. 후자 가운데는 남주헌처럼 사천이나 곤양에서 배를 타고 섬진강을 따라 화개에 곧장 닿는 경우도 있었다. 화개는 하동 유람의 베이스캠프라 할 수 있다.
[하동 유람의 최난(最難) 코스, 불일암]
쌍계사에서 불일암으로 오르는 길은 선비들의 하동 유람 중 가장 험한 코스로 유명하다. 1727년(영조 3) 9월 12일 금산군(錦山郡)을 출발하여 하동 쌍계동을 거쳐 가야산 해인사와 속리산 법주사를 유람하고 서울로 올라가는 23일간의 장기 유람을 즐겼던 춘주(春洲) 김도수(金道洙)[1699~1733]의 유람록에 의하면, 이 길에는 호랑이도 많이 나타났다고 전한다. 쌍계사 승려가 불일암을 오르려는 그에게 “이곳엔 호랑이가 자주 출몰한다.”고 경고한 후 쌍각(雙角)을 불며 앞에서 인도했다고 적고 있는데, 비탈길을 따라 내려올 적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한 무더기의 호랑이 똥을 보기도 했으며, 이에 승려들이 다시 쌍각을 불어 호랑이의 접근을 막았다고 한다.
쌍계사 뒤쪽으로 난 산속으로 외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산길이 점점 깎아지른 듯 험해진다. 불일암은 한 가닥 돌계단을 오르며 헐떡이는 숨을 몇 번이나 몰아쉰 뒤에야 닿을 수 있는 깊숙한 골짜기에 숨겨져 있다. 오르는 내내 주변의 우뚝한 봉우리들이 유람자가 얼마나 깊은 골에 들어와 있는지를 알게 해 준다. 골이 깊어 물줄기가 보이지 않는데도 어디선가 계곡물 떨어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린다. 땅만 바라보고 한참을 올라가다 고개를 들어보면 저 멀리 하늘 끝 나무 숲 사이로 언뜻언뜻 암자의 끝자락이 보인다. 김도수는 아득히 구름 끝에 풍경을 매달아 놓은 듯하다고 표현하였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온다.
지체 높은 관료들은 이런 험난한 길을 승려가 메는 남여(藍輿)를 타고 올랐다. 주로 쌍계사나 신흥사에 거주하던 젊은 승려들이 남여를 메었다. 남여를 타고 오르면 편할 듯도 하나, 그것이 마냥 좋은 것만도 아니었다. 그 좁은 산길에서 타고 가는 남여가 편할 리 있겠는가.
1618년(광해군 10) 4월 11일부터 7일간 하동 청학동을 찾아 지리산을 유람했던 현곡(玄谷) 조위한(趙緯韓)[1567~1649]은 불일암을 오를 때 가파른 비탈길을 남여를 타고 올랐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남여를 짊어진 승려의 헐떡이는 숨소리는 쇠를 단련하는 듯 거칠었고, 등에는 진땀이 흥건하였다. 다섯 걸음, 열 걸음마다 어깨를 바꾸고 위치를 옮겼다.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며, 오른쪽으로 기울기도 하고 왼쪽으로 기우뚱거리기도 하였다. 남여를 타고 있는 괴로움도 남여를 멘 고통 못지않았다.”라고 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윤4월 15일부터 33일간 장성에서 출발하여 불일암 일대를 유람했던 양경우(梁慶遇)[1568~1629]의 기록은 특히 사실적이어서 재미있다. 쌍계사에서 출발할 때 승려들이 남여를 가지고 뒤따르자, 양경우는 짐짓 젊었을 적 체력이 좋았다고 자부하며 두고 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승려들에게 등 뒤에서 밀라고도 하고, 바위에 주저앉아 쉬기도 하였다. 결국 남여를 타고 오르는데, 오를수록 승려들은 지쳐 갔다. 양경우는 그들이 소처럼 숨을 몰아쉬며 구슬 같은 땀을 줄줄 흘렸다고 하였다.
그러자 한 노승이 뒤따르며 지친 승려들에게 채근하기를, “길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게을리 말아라. 게을리 말아라. 작년에 하동 수령은 몸집이 비대해서 산처럼 무거웠는데도 너희들이 감당해 냈다. 그런데 이번 산행을 어찌 고생스럽다 하겠느냐.”라고 하였다. 이에 남여를 멘 승려들이 말하기를 “왜 하필이면 하동 수령을 말합니까. 얼마 전 토포사 영감이 오셨을 때도 어지간히 복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남여를 타고 있던 양경우는 이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었다고 한다.
건장하고 젊은 승려들이 비대한 몸집의 포토사를 남여에 태우고 좁은 산길을 올라간다고 상상해 보라. 남여에 타고 있던 그 포토사 또한 내려서 걷는 것보다 더 심기가 불편하지 않았을까 싶다. 남여꾼은 민간에서 구하기도 했지만, 대체로 지리산권역 사찰에서 공부하던 승려들이었다. 유람록을 살펴보면 쌍계사나 신흥사 등 큰 사찰에는 많게는 수백 명의 젊은 학승들이 있었다. 그들은 평상시 불법을 공부하며 정진하다가 유람 온 관료들의 남여꾼이나 안내자 역할을 하였다. 주로 젊은 승려는 남여꾼으로, 노승은 안내자로 많이 활용되었다.
[또 다른 볼거리, 삽암과 악양정]
악양은 중국 호북성의 한 현(縣)으로, 그곳에는 악양루(岳陽樓)·동정호(洞庭湖)·군산(君山) 등 여러 이름난 유적이 있다. 악양루는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를 비롯해 두보(杜甫)와 이백(李白)의 「등악양루(登岳陽樓)」라는 시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악양루에 올라 한눈에 바라보이는 호수가 동정호이며, 동정호 속의 섬이 바로 군산이다.
하동군 악양은 중국 악양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지명은 물론 대표적인 유적으로 악양루와 동정호가 있다. 하동 청학동을 찾아 악양을 지나는 조선 시대 선비들은 이러한 역사와 유적들을 시로 읊어 내었다. 그중 현재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하동을 유람하는 선비들이 반드시 거쳐 갔던 명승이 바로 삽암(鍤巖)과 악양정(岳陽亭)이다.
삽암은 고려 후기 은자인 녹사(錄事) 한유한(韓惟漢)이 난세를 피해 은거했던 곳이며, 악양정은 조선의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이 은거했던 유허지이다. 이 두 곳은 섬진강을 따라 배를 타고 화개동을 찾아가는 도중 섬진나루에 정박하고서 찾던 코스였다. 일정이 촉박해 내려서 유람하지 못하거나 밤배를 타고 두 곳을 지나쳐야 할 때는 배 위에서 두 선현을 그리워하며 한참을 아쉬워하기도 하고, 피리나 퉁소를 연주하게 해서 그 아쉬움을 달래곤 하였다.
하동 읍내를 지나 왼쪽으로 섬진강을 끼고 화개 10리 벚꽃길을 달리다 보면 오른쪽에 넓디넓은 들판이 나타난다. 악양 들판이다. 멀리 보이는 고소산(姑蘇山)의 운치와 길게 드리운 섬진강 줄기가 어우러진 광활한 풍경이다. 악양 들판이 끝나는 지점인 삼거리 왼쪽에 조그마한 바위가 솟아 있는데, 바로 삽암이다. 삽암은 ‘꽂힌 바위’라 부르기도 하며, 이곳 사람들은 ‘섯바구·선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예부터 남해와 섬진강의 어선들이 정박하였고, 영호남을 연결하는 나룻배가 다니던 곳이었다.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은 바로 소설 『토지』의 배경으로 유명한 평사리 최참판댁으로 들어가는 초입이다. 하동군에서는 평사리 최참판댁을 홍보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반면 삽암은 포장된 도로에서 보면 조그마한 바위에 불과하고, 그 위에 비석 두 기가 세워져 있으니,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여느 집안의 선조를 표상하는 비석쯤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더구나 이곳은 주차시킬 만한 공터가 여의치 않기 때문에, 굳이 찾으려 애쓰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쳐도 모를 정도이다.
그런데 섬진강 밑으로 내려가 바위를 올려다보면 제법 우뚝한 위용이 있다. 강에서 바라보면 바위 끝에 ‘모한대(慕韓臺)’라 적혀 있다. 악양의 부호였던 이세립(李世立)이 한유한의 절의를 흠모하여 바위에 ‘모한대’라 새겼다고 전한다.
석백계청무점루(石白溪淸無點累)[하얀 돌 맑은 시내 한 점 티끌도 없네]
석인수복차암변(昔人誰卜此巖邊)[옛 사람 중 누가 이 바위 가에 살았나]
사륜입동유원주(絲綸入洞踰垣走)[담장 넘어 달아나 사륜동으로 들어가]
방장천추독일선(方丈千秋獨一仙)[천 년토록 방장산의 한 신선 되었다네][박민, 「삽암(鍤巖)」]
녹사금안재(錄事今安在)[한 녹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무인계고종(無人繼故蹤)[사람은 없고 옛 자취만 남았네]
방명전한죽(芳名傳汗竹)[꽃다운 명성 역사서에 전하니]
왕사문한송(往事問寒松)[지난 일은 겨울 솔에게 묻노라][조위한, 「과한녹사구기(過韓錄事舊基)」]
앞의 시는 능허(凌虛) 박민(朴敏)[1566~1630]이 1616년(광해군 8) 9월 부사 성여신(成汝信)[1546~1632] 등과 하동을 유람하다 악양을 지날 때 지은 것이고, 뒤의 것은 조위한(趙緯韓)이 1618년(광해군 10) 4월 역시 하동을 유람할 때 지은 시의 일부이다. 고려 조정에서 대비원녹사(大悲院錄事)라는 관직으로 은거 중인 한유한을 불러내려 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달아나 자신의 절의를 지켰던 점을 숭상하고, 그 절의가 역사에 남아 길이 전해질 것이라 칭송하고 있다.
삽암에서 구례 방면으로 약 6㎞ 남짓 자동차로 달리면 오른쪽에 ‘악양정’이란 조그마한 입간판이 나타난다. 이 또한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쳐도 모를 만큼 부실하다. 그 입간판을 따라 마을로 조금 걸어 올라가면 4칸의 단아한 정자가 나타나는데, 바로 악양정이다. 정여창이 은거하여 학문을 닦고 제자를 기르던 곳이다.
정여창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조선조 유학을 흥기시킨 인물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강원도 종성 땅에 유배되었다가 1504년(연산군 10)에 죽었는데, 그 해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좌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이곳은 행정구역상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인데, ‘덕은(德隱)’이란 지명이 덕 있는 현자가 숨어살던 곳임을 알려 주는 듯하다.
정선생시유림장(鄭先生是儒林匠)[정 선생은 바로 우리 유림의 종장이시니]
만복유정계수서(晩卜幽貞溪水西)[만년에 시내 서쪽 고요한 곳에 살았네]
낙일정참상왕사(落日停驂傷往事)[석양에 말 세우고 지난 일 상심하노니]
운용수색공처처(雲容水色共悽悽)[구름도 물빛도 온통 처량하기만 하네][성여신, 「방장산선유일기(方丈山仙遊日記)」 중]
위 시는 성여신(成汝信)이 하동 유람 중 악양정에 들러 지은 것으로, 정여창을 조선조 유학의 종장으로 크게 인정한 후 유허지에서 시대와 어긋난 그의 처세와 운명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삽암과 악양정은 조식이 1558년(명종 13) 4월 하동 쌍계사 방면으로 유람하고 남긴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 거론한 이후, 근세까지 하동을 유람하는 수많은 선비들이 지조와 절의의 상징으로 칭송하던 명승이었다. 그러나 현재 삽암은 그저 길게 늘어선 섬진강 가의 한 부분일 뿐이다. 악양정 또한 눈에 잘 띄지도 않은 입간판 하나로 사람들의 발길을 잡지 못한다.
우선 삽암 꼭대기에 세운 두 기의 비석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주변을 정리하여 조그마한 안내판이라도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두 곳 모두 교육적 가치를 지닌 역사적 명승이었음에도 공허함만 남긴 채 찾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 곁의 섬진강은 오늘도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