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4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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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館頭山烽燧址 |
영어공식명칭 | Gwandusan Signal-fire Site |
이칭/별칭 | 화산 봉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관동리 관두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변남주 |
건립 시기/일시 | 14148년~1450년[조선시대 세종 연간] - 관두산 봉수지 관두산 봉수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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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15년 06월 29일 - 관두산 봉수지 해남군 향토문화유산 제29호 지정 |
소재지 | 관두산 봉수지 -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관동리 관두산 정상 |
성격 | 봉수지 |
지정 면적 | 165㎡ |
소유자 | 전라남도 해남군 |
관리자 | 전라남도 해남군 |
문화재 지정 번호 | 해남군 향토문화유산 제29호 |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관동리 관두산 정상에 있는 조선시대 봉수 터.
[개설]
봉수는 삼국시대 이래로 연안을 방호하는 관방 시스템의 하나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해남 지역에 설치된 봉수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확인된다. 조선시대 해남현에는 화산 관두산(館頭山)[177m]을 비롯하여 일성산(日星山), 금강산(金剛山)에 있었고, 강진현 좌곡산, 영암군의 갈두와 달마산에 있었다. 상호 응하는 순서는 좌곡산~갈두~관두~진도 첨찰산~일성산~목포 유달산으로 연결되었다. 봉수들은 전라우도의 연안에 속하여 전라우수사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
[변천]
관두산 봉수(館頭山烽燧)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해진군 조에 “봉화가 1곳이니, 화산(花山)이 군의 남쪽에 있다. 동쪽으로 영암의 갈두(葛頭)에 응하고, 북쪽으로 영암 황원(黃原)에 응하고, 서남쪽으로 여귀산(女歸山)에 응한다.”라고 기록되었는데, 바로 화산 봉수가 관두산 봉수를 가리킨다. 영암군의 갈두(葛頭)와 황원(黃原) 그리고 강진현의 좌곡산(佐谷山) 봉수가 기록되었는데 현재의 해남 지역에 설치된 봉수이다. 이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 들어와서 분포하는 봉수와 상응 관계는 큰 변화가 없다. 그런데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화산 관두산 봉수는 서쪽으로 진도 여귀산에 응하고 남쪽으로는 영암 달마산 봉수에 응한다[花山館頭山烽燧 在縣南四十里 西去應珍島郡女貴山烽燧 南來應靈巖麻山烽燧].”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특이한 것은 관두산 봉수가 이전에는 남쪽으로 갈두산 봉수에 응하였으나 달마산 봉수로 변경된 점이다. 이어 『해남읍지』[1872]에서 다시 관두산 봉수는 남쪽으로 갈두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진도 첨찰산에 응하는 봉수로 기록되었다. 관련 기록으로는 『문종실록(文宗實錄)』1451년(문종 1) 4월에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진도현(珍島縣) 화산 봉화(花山烽火)는 바다 건너 멀리 있으며, 또 민가의 연기와 서로 섞이니, 청컨대 가을걷이를 기다린 뒤에 관두(館頭)로 옮기게 하소서하니, 이에 따랐다[議政府據兵曹呈, 啓: “珍島縣 花山烽火, 隔海遙遠, 且與閭閻烟火相雜, 請待秋成, 移置館頭。從之].”라는 기록이 나온다.
[위치]
관두산 봉수는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화산 관두산 봉수는 현의 남쪽 40리[약 15.71㎞]에 있다.”라고 하였다. 현재의 화산면 관동리 관두산에 정상에 있다.
[현황]
관두산 봉수지는 관두산 중턱의 샘을 지나 정상 쪽으로 올라가면 나온다. 현재는 봉수대를 만들었던 돌무더기의 아랫부분만 남아 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멀리 땅끝의 갈두와 바다와 맞은편에는 진도 땅 여귀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의의와 평가]
관두산 봉수는 서남해 연안을 방어하는 관방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게다가 산의 남쪽에는 무역항인 관두량이 있어 제주와 왕래하는 사신들이 머무르는 관이 설치되었다. 이처럼 관동리는 배가 많이 드나드는 곳이어서 관두산 봉수는 상호 연락하는 특별한 기능도 겸한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