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2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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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阿羅伽耶 |
이칭/별칭 | 아야가야, 아나가야,아라국,아시량국,안야국,안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가야 |
집필자 | 남재우 |
[정의]
경상남도 함안 지역에 있던 가야 시기 고대 국가.
[개설]
삼국 시대 함안 지역에 위치한 고대 국가의 이름은 기록에 따라 서로 다르다. 이러한 현상은 함안 지역을 포함한 가야에 속한 나라들의 경우 고구려, 백제, 신라처럼 가야 주체의 역사서를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함안 지역 가야의 경우 현재 함안 지역민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흔히 부르는 국명이 아라가야(阿羅伽耶)이다. 역사서에 보이는 함안 지역의 고대 국가 이름은 다음처럼 다양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오가야 조에서는 아라가야(阿羅伽耶)·아야가야(阿耶伽耶),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는 아시량국(阿尸良國)·아나가야(阿那加耶), 『삼국사기』 「열전(列傳)」에는 아라국(阿羅國), 『삼국지(三國志)』에는 안야국(安邪國), 광개토대왕 비문과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안라(安羅), 『양직 공도(梁職貢圖)』 백제국 사전 도경 조에는 전라(前羅)로 기록되어 있다. 지역 명으로는 경주 남산 신성비에 아량촌(阿良村), 『일본서기』에는 아라라성(阿羅羅城)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함안 지역의 고대 국명 중에서 ‘〇〇가야’로 불리는 국명은 가야가 존재하던 시기에 쓰여진 것이 아니라, 신라 말 고려 초에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가 서술된 역사서 중에서 가야가 존재하던 시기나 가까운 시기에 쓰여진 자료는 『삼국지』와 광개토대왕 비문, 『일본서기』이므로 이들 기록에 나타나는 함안 지역 국명이 당시 사용되던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삼국지』는 3세기 중엽, 광개토대왕 비문은 5세기 전반, 『일본서기』는 8세기 초의 기록이다. 『양직 공도』에 나오는 전라는 6세기 초 상황을 기록한 자료인데, 당시 백제와 아라가야의 관계로 보아 전라는 ‘앞라’의 뜻을 빌린 것이므로 안라로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가야가 존재한 시기에 쓰인 역사서나 금석문에 나타나는 함안 지역의 국명은 안야국과 안라이다. 안야는 3세기에 쓰인 『삼국지』에 변한의 12국 중 하나인 안야국으로 나타난다. 안라는 광개토대왕 비문에 ‘안라인 수병(安羅人戍兵)’으로 나타나며, 『일본서기』에서도 안라가 여러 차례 나타난다. 그러므로 함안 지역의 가야 시기 국명은 '안야'와 '안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다만 안야는 삼한 시기까지의 국명이고, 안라는 삼한 시기 이후부터 가야가 멸망하는 시기까지를 가리키는 국명이다.
이를 통해 가야 전기에는 안야국으로, 가야 후기에는 안라로 불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삼한 시기의 안야국은 가야사의 전기에 해당하므로 함안 지역의 가야 시기 고대 국명은 안라국이라 명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다만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함안 사람들의 대부분이 아라가야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므로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아라가야라고 불러도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아라가야라는 이름이 가야가 존재하던 시기의 기록은 아니지만 『삼국유사』의 오가야 조에 아라가야라 적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라가야는 가야 시기 당시의 이름이 아니라, 신라 말 고려 초 이후에 ‘아라(阿羅)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가야의 여러 나라 중 한 나라’라는 뜻임은 틀림없다.
[명칭 유래]
13세기 말에 편찬된 『삼국유사』 오가야 조에 처음 아라가야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형성 및 변천]
아라가야는 기원을 전후로 한 시기에 정치 집단으로 형성되었는데 중국 사서인 『삼국지』 한전에서는 변진 안야국으로 나타나며, 4세기 이후에는 『일본서기』와 광개토대왕 비문에 안라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에 기록된 아라가야는 전기에는 안야국으로, 후기에는 안라로 불렸던 것이다. 560년경 신라에 복속되었다.
[관련 기록]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에 오가야 조에 "아라[야(耶)라고도 한다]. 가야[지금의 함안], 고령가야(古寧伽耶)[지금의 함녕(咸寧)], 대가야(大伽耶)[지금의 고령(高靈)], 성산가야(星山伽耶)[지금의 경산(京山)이니 (혹은) 벽진(碧珍)이라고도 한다], 소가야(小伽耶)[지금의 고성(固城)이다] 또 본조(本朝)의 『사략(史略)』에 이르기를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에 오가야의 이름을 고치니 1은 금관[김해부(金海府)가 되었다]이고, 2는 고령[가리현(加利縣)이 되었다]이며, 3은 비화(非火)[지금의 창녕이란 것은 아마도 고령의 잘못인 것 같다]이다. 나머지 둘은 아라와 성산[앞과 마찬가지로 성산은 벽진가야라고도 한다]이다'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