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7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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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成好正 |
영어공식명칭 | Seong Hojeong |
이칭/별칭 | 상부(尙夫),강재(彊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병철 |
[정의]
조선 후기 함안에서 활동한 유학자.
[개설]
성호정(成好正)[1589~1639]은 함안에서 활동한 학자이다. 과거 시험에 뜻을 두지 않고 일평생 학문을 탐구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다. 남명(南冥)조식(曺植)의 제자인 황암(篁巖)박제인(朴齊仁), 내암(來庵)정인홍(鄭仁弘), 한강(寒岡)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남명학을 계승하였다.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상부(尙夫), 호는 강재(彊齋). 증조할아버지는 통선랑(通善郞)을 지낸 조수(釣叟)성진손(成震孫)이며, 할아버지는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역임한 정산(定山)성준(成遵)[1515~1548]이다. 아버지는 선교랑(宣敎郞)을 지낸 작계(鵲溪)성경침(成景琛)[1543~1610]이며, 어머니는 내금위(內禁衛) 이탁(李倬)의 딸 성주 이씨(星州李氏)이다. 부인은 능허(凌虛)박민(朴敏)의 딸 태안 박씨(泰安朴氏)이다. 아들이 없어 동생 성와(惺窩)성호진(成好晉)[1598~1658]의 맏아들 성서(成澨)를 양자로 삼았다. 사위는 이시송(李時松)과 조문(趙璊)이다.
[활동 사항]
성호정은 과거 시험에 뜻을 두기보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학문을 탐구하고 수양하는 삶을 추구하였다. 함안을 중심으로 강학 활동을 하면서 남명학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614년(광해군 6) 내암정인홍의 제자인 동계(桐溪)정온(鄭蘊)이 광해군(光海君)에게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한 강화 부사 정항의 목을 베고 영창 대군의 위호를 회복할 것을 상소하였다가 제주도 대정으로 귀양 가서 위리안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정온의 억울함을 신원하기 위하여 선비들이 의령에 모여 논의를 했는데, 성호정이 이이영(李而楧)과 함께 모임을 주도하였다. 1622년(광해군 14)에는 하협(河悏)과 함께 상경하여 대궐 앞에서 상소를 올렸다. 이와 같은 유학의 도를 실천하기 위해 힘썼으며, 동생 성호진과 우애롭게 지내며 함께 학문을 강마하였다.
[학문과 저술]
조식의 제자인 박제인, 정인홍, 정구에게 수학하였으므로 그의 학문은 남명학을 계승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문집인 『강재 유고(彊齋遺稿)』 부록에 박민의 「사우록(師友錄)」이 첨부되어 있는데, 성호정이 이른 나이에 정인홍을 스승으로 섬겼다가 이이첨과 가까이 지낸다는 사실로 인해 관계를 끊었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성호정은 당시 일반적인 학자들과 같이 사서오경을 중심으로 학문을 익혔으며, 조식뿐 아니라 회재(晦齋)이언적(李彦迪)과 퇴계이황(李滉)의 학문도 존숭하였다고 전한다. 장인이자 남명 학파의 선배인 박민은 그에 대해, “평생 행한 일이 정대(正大)하여 조금도 구차한 것이 없었다. 학문을 익힌 것이 강건하고 독실하였는데, 훌륭한 일을 보면 자신이 따라가지 못할까 염려하며 항상 노력했다.”라고 칭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