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7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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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漢柱 |
영어공식명칭 | Bak Hanju |
이칭/별칭 | 천지(天支),오졸재(迃拙齋),정간(貞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우곡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류진희 |
[정의]
조선 전기 함안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천지(天支), 호는 오졸재(迃拙齋). 고조할아버지는 행산(杏山)박세균(朴世均)이고, 아버지는 통사랑(通仕郞) 박돈인(朴敦仁)이다.
[활동 사항]
박한주(朴漢柱)[1459~1504]는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豊角面)차산(車山)에서 태어났다. 함안 사람인 안효문(安孝文)의 딸에게 장가들어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우곡리로 옮겨 와 살았다. 16세 때 한훤당(寒暄堂)김굉필(金宏弼)과 더불어 점필재(佔畢齋)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83년(성종 14)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1485년(성종 16)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사간원 정언·성균관 전적 등을 지내고, 부모 봉양을 위해 자진해서 창녕 현감으로 나왔다. 당시 고과에서 1등을 받자 성종이 특별히 품계를 올려 주고, 전후 두 차례에 걸쳐 옷과 교서를 내려 포상하였다.
임기 후 내직으로 들어가 종부시 주부·군자감 판관·지제교 등을 거쳐 1497년(연산군 3) 사간원 헌납 겸 춘추관 기주관이 되었다. 이때 곧은 성품으로 연산군의 실덕(失德)을 직간하였으며, 또 임사홍(任士洪) 등을 탄핵하는 차자(箚子)를 올렸다. 이후 갈수록 연산군의 횡포가 심해지자 늙은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외직을 청하여 평해 군수, 예천 군수 등을 지냈다. 1498년 7월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지어 자기들끼리 서로 칭송하고, 때로는 국정을 헐뜯으며 시사를 비방한다는 죄명으로 평안도 벽동(碧潼)에 부처(付處)되었다가, 경신년 다시 전라도 낙안(樂安)으로 이배되었다. 당시 화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신재(新齋)최산두(崔山斗)와 같은 뛰어난 제자를 가르쳤다. 이 해 임소에서 부친상을 당해 몇 번이나 혼절하였다가 소생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무오당인(戊午黨人)으로 죄가 더해져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전라도 순창 적소(謫所)에 있던 탁영(濯纓)김일손(金馹孫)이 그에게 화가 닥칠 것을 알고 사실을 밝힐 것을 권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이 해 5월 15일 처형되어 46세로 일생을 마쳤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문집인 『오졸재 실기(迃拙齋實記)』가 있다.
[묘소]
묘는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서낭곡[현 가야읍 가야리] 광주 안씨(廣州安氏) 선산에 있다. 1587년(선조 20) 함안 군수 한강(寒岡)정구(鄭逑)가 “박한주를 위해 사우(祠宇)를 창립하고 그의 무덤 위에 흙을 더 쌓고 제사를 지냈다.”라고 기록한 것이 남아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1506년(중종 1) 중종 반정으로 신원되고, 1517년(중종 12) 도승지 겸 직제학에 추증되었다. 밀양예림 서원, 청도남강 서원, 함안덕암 서원(德巖書院)에 제향되었다. 1629년(인조 7)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신음리에 ‘오졸재 박한주 비(迃拙齋朴漢柱碑)’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