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8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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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孫良源 |
영어공식명칭 | Son Yangwon |
이칭/별칭 | 손연준,산돌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덕산4길 39[구성리 685]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장혜금 |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목사.
[활동 사항]
손양원(孫良源)[1902~1950]은 1902년 6월 3일 함안군 칠원읍 덕산4길 39[구성리 685]에서 독립운동가 손종일(孫鍾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김은수이다. 아들은 손동인(孫東印)과 손동신(孫東信)이다.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나 아버지와 함께 나라를 찾게 해 달라고 기도를 올리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고, 칠원 공립 보통학교 재학 시절이던 1915년부터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였다. 중동 학교(中東學校)에 재학 당시 목사로부터 1919년 3·1 운동 독립 선언식의 계획을 듣고 중동 학교 학생뿐 아니라 다른 학교 학생의 참여를 적극 유도하였다는 명목으로 퇴학을 당하였다.
1935년 평양 신학교(平壤神學校)에 진학하였다. 신학교 졸업반 때인 1938년 일제 탄압에 굴복하여 평안북도 노회(老會)가 신사 참배를 수용하기로 결정하고, 같은 해 9월 10일 조선 예수교 장로회에서도 신사 참배를 가결하였다. 이에 주기철 목사를 중심으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이 벌어졌다. 손양원도 신사 참배를 반대하며 ‘성경에 우상 숭배는 금기 사항이고 우리 조선 사람이 일본의 개국신(開國神)과 일본 왕에게 참배할 이유가 없다’는 설교와 강연을 하였다.
1939년 7월 전라남도 여수의 나병 환자 요양소인 애양원(愛養院) 교회의 교역자로 부임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생을 나환자들과 함께 보내기로 결심한다. 그는 손연준이라는 이름도 손양원으로 고쳤고, 그의 부인도 양순(良順)으로 개명하였다. 신사 참배의 거부와 일제 패망을 발언함으로써 1940년 9월 25일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41년 11월 4일 광주 지방 법원에서 치안 유지법으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하여 옥고를 치렀다. 광복으로 석방되고 1946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8년 10월의 여수·순천 사건에서 두 아들이 총살당하였으며, 6·25 전쟁에서는 손양원도 공산군에 체포되어 순교하는 비운을 맞았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