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3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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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 時代 |
영어공식명칭 | History of the Joseon Dynasty in Hwaseong-S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창훈 |
[정의]
조선 왕조가 존속한 1392년부터 1910년까지 경기도 화성 지역의 역사.
[개설]
조선 시대 화성 지역에는 수원도호부와 남양도호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지금의 행정 구역을 기준으로, 수원도호부는 봉답읍 등의 화성시 동부 지역과 수원시·오산시 일대, 남양도호부는 남양읍을 비롯한 화성시 서부 지역을 관할하였다. 남양도호부는 수원도호부에 비해 인구가 적고 위상은 낮았지만, 남양만 일대의 해안 방어와 관리를 도맡았기 때문에 전략적 중요성은 뒤지지 않았다. 수원도호부와 남양도호부에서 나는 특산물로는 아악기인 경쇠를 만드는 재료인 경석(磬石), 옥을 가는 데 쓰인 모래인 정옥사(碇玉沙), 각종 생선과 조개류, 소금 등이 있었다.
[남양도호부의 변천]
남양도호부는 1413년(태종 13) 지방 행정 구역 정비 과정에서 설치되었으며, 읍치는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에 있었다. 1644년(인조 22) 역적 형(衡)이 태어난 곳이라는 이유로 남양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53년(효종 4) 복구되었다. 또 1665년(현종 6)에는 종이 주인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여 다시 남양현으로 강등되었고, 1674년(현종 15) 복구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충이나 효를 거스르는 반역 사건이 발생하면 지방 행정 구역의 위상이 강등되는 일이 흔히 발생하였다. 이후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전면적인 행정 구역 개편이 이루어질 때 인천부 남양군이 되며 도호부 체제가 종식되었다.
한편, 조선 초에는 수도 한양의 방비와 조운로의 보호를 위해 서해안에서 한강을 이용하여 수도로 향하는 통로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 중 하나였다. 그에 따라 남양만을 거쳐 한강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방어 거점을 마련하였는데, 지금의 남양읍 서북쪽 송산면 일대에 설치한 화량진과 남양읍 서남쪽 서신면 일대에 설치한 영종포가 그것이다. 특히 화량진의 경우 경기도 지역 수군을 총괄하는 경기수영이 있던 곳인데, 15세기 전반 당시 경기도 지역 수군 전체 병력의 절반 이상이 화량진에 배치되어 있었다.
[수원도호부의 변천]
수원도호부 역시 1413년(태종 13) 지방 행정 구역 정비 과정에서 설치되었으며, 읍치는 화산(花山)에 있었다. 화산은 지금의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화성 융릉과 건릉' 일대이다. 1526년(중종 21) 수원부 사람이 부모를 죽인 사건이 있어 수원군으로 강등되었다가 1535년(중종 30) 복구되었다.
수원도호부에는 조선 전기 진관제 정비 과정에서 ‘수원진’이 설치되었다. 수원진은 당시 경기도 지역 방위 체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군진이다. 수원도호부사가 첨절제사를 겸임하였으며, 군병의 수는 1470년(성종 1) 당시 경기도에서 가장 많은 2,713명이었다.
[화성유수부의 설치와 의미]
수원도호부가 1793년(정조 17) 유수부로 승격되면서 화성유수부가 되었다. 수원도호부의 유수부 격상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도호부 읍치가 있던 화산으로 옮기고 팔달산 아래에 새로운 읍치를 조성하면서 이루어졌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은 이때 조성된 신읍치를 둘러싼 성곽이다. 초대 유수로는 좌의정을 지낸 정조의 최측근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임명되었다. 화성유수부는 19세기 말까지 유지되다가 1895년 을미개혁 때 지방 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수원군으로 개편되었다.
정조는 즉위 후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방치되었던 무덤을 옮겨와 왕릉급으로 조성하였으며, 자신 또한 아버지 옆에 잠들기를 소망하였다. 화성유수부는 정조의 이러한 계획을 안정적으로 뒷받침하고, 정치 개혁을 완수하기 위한 거점으로서 조성한 것이다. 즉, 수원도호부의 화성유수부 승격은 단순한 지방 제도 개편이 아닌, 정조의 왕권 강화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정조의 친위대인 장용영 외영이 수원 화성에 설치된 것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정조 사후 권력을 잡은 벽파 세력은 정조 대의 정치를 부정하는 행보를 보였고, 이에 따라 화성유수부의 위상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