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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탄광에서 급사도 하고 탄도 캤지요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B030301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오동리 천운 마을|복암리 구암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미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박덕중씨,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다 1943년 - 1943년 박덕중 씨가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박덕중씨, 강원도 탄광 마을로 이사 1952년 - 1952년에 박덕중 씨가 강원도 탄광 마을로 이사하였다.
박덕중씨, 전남 화순탄광 마을로 이사하고, 화순 광업소 급사가 되다. 1958년 - 1958년 박덕중 씨가 전남 화순탄광 마을로 이사하고, 화순 광업소 급사가 되었다.
박덕중씨, 군입대 1961년 - 1961년 박덕중 씨가 군에 입대하였다.
박덕중씨, 군제대 후 화순 광업소 광부가 되다. 1963년 - 1963년 박덕중 씨가 군제대 후 화순 광업소의 광부가 되었다.
박덕중씨, 화순경찰서 소속 청원경찰이 되다. 1963년 - 1963년 박덕중 씨가 화순경찰서 소속 청원경찰이 되었다.
박덕중씨, 독일광부가 되다. 1971년 - 1971년 박덕중 씨가 독일광부가 되었다.
박덕중씨, 독일에서귀국하다. 1973년 - 1973년 박덕중 씨가 독일에서 귀국하였다.
마을지 박덕중의 집 -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잠정리 33번지

[아버지를 따라서 강원도 탄광에서 화순 탄광으로 오다]

박덕중 씨는 현재는 화순군 능주면 잠정리에서 방앗간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부터 독일[정확히 서독]에 광부로 가기까지 16세부터 29세까지 13년간 대한 석탄 공사 화순 광업소에서 급사로 그리고 광부로 일을 했던 삶의 경험을 갖고 있기도 하다.

박덕중 씨는 1943년에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 박덕중 씨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강원도 탄광의 광부로 일하게 되면서 가족들이 모두 강원도로 이사를 했단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아버지가 다시 이곳 화순 광업소로 직장을 옮기면서부터 화순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전에는 화순 광업소 사택이 십촌 옆에 성덕실이 있고 동암 사택이 있어. 그 전에는 집들이 따닥따닥 붙었어. 방 두 개 부엌 하나. 이렇게 칸 두개 판자때기로 이렇게 막아가지고 집이 쭉 있어. 인자 여섯 가구 네 가구 이렇게 지다란 집에 살았어. 어머니는 생활이 곤란해서 탄 찌갱이를 긁어다가 손으로 찍어서 탄을 만들어서 쓰고 그랬어. 광부들한티는 한 달에 백장씩 탄 배급이 나와요. 그러면 그 탄을 팔아서 생활비를 쓰고, 탄 찌갱이 긁어다가 탄을 만들어서 썼어요.”

화순 광업소에서 광부들에게 제공하는 사택에서 살았지만, 아버지가 매번 술로 월급을 다 날리는 통에 어머니가 6남매를 키우느라 안 해본 고생이 없었다고 박덕중씨는 당시를 회고했다.

[화순 광업소 급사에서 광부로 살던 시절]

박덕중 씨가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당시 선탄과 도자 운전수였던 옆집 아저씨 덕분에 광업소의 도자 운전수 조수가 되었다. 그리고는 성실함을 인정받아서 열일곱 살에 공무과의 급사로 취업이 되었다. 급사는 정식 직원은 아니고, 사무실 사람들이 돈을 모아서 월급을 주어 쓰는 사람인데, 새벽 4시면 사무실에 가서 ‘빵탄 불[빵처럼 둥그렇게 생긴 숯을 피워 난방을 하는 난로]’을 피워놓고 사무실 청소를 했다고 한다. 거기서 급사 생활을 4년 하고, 다시 ‘남항’[광업소 사무실 이름]에서 급사를 하다가 군대를 자원해서 갔다고 한다. 그런데 군에서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2년 만에 제대를 해야만 했는데, 워낙에 화순 광업소에서 급사 생활을 할 때 성실함을 인정받아서인지, 광업소에 복직하기는 쉬웠다고 한다. 그런데 처음 복직할 때 자신이 과거에 했던 사무실 급사가 아닌 막장의 광부로 들어가게 되어서 처음에는 몹시 서운했다고 한다.

“63년도에는 그 당시에는 탄광이 그렇게 시설이 안 좋았어요. 나무로 이악 동발을 해서 항매 이렇게 들어가 가지고 거기서 인자 탄 있는데를 노블이라고 해서 거기를 뜯어갖고 굴을 뜯어갖고 거기 위에서, 인자 발파를 해갖고 탄이 쏟아지믄 그 밑에다 구르마를 대고, 막 그 전에는 기계도 없고 삽으로 전부 실었어요. 그래갖고 거기서 인자 탄을 캐고 그러는데 아주 위험하기가 말할 수 없어요. 그런 식으로 탄을 캐는데 사고가 많이 났습니다. 큰 사고도 많이 나고 막 위험하기도 하고.”

1960년대에는 굴속의 탄이 있는 ‘노블’에 대고 발파를 해서 탄이 쏟아지면, 밑에서 탄을 ‘구르마’[손수레]로 받아서 삽으로 퍼 실어 나르는 방식으로 채탄 작업이 이루어졌다는데, 몹시 위험한 일이어서 사망 사고도 자주 일어났었다고. 그래도 광부들은 하루의 정량을 맞추기 위해 정말로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한다.

[광부에서 청원 경찰로, 다시 독일 광부로, 화순의 능주 방앗간 주인으로]

박덕중 씨가 그렇게 광부로 6개월을 일을 하고 있는데, 간첩 김신조 사건이 터지면서 화순 경찰서에서 청원 경찰을 뽑는 공고가 났다. 군에서 다친 허리 때문에 몸이 안좋았던 박덕중 씨는 그대로 광부 일을 그만두고 청원경찰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청원경찰을 4,5년 동안 했는데, 그가 하는 일은 동암 사택이 있는 도로변의 교통 정리나 천운장과 극장 앞의 사택의 초소를 지키는 정도의 일만 하니 몹시 편한 일이었다고 한다. 청원경찰 한지 3년이 되던 해에 큰어머니의 중매로 고향인 정읍 처녀와 결혼도 했다. 그렇지만 도무지 청원 경찰의 무료한 삶이 안타깝기만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70년대에 독일에서 광부를 모집해갔는데, 박덕중 씨는 거기에 합격해서 2년 8개월을 근무하고 다시 한국에 들어왔다고 한다. 1971년 1월, 박덕중 씨는 생애 처음으로 비행기를, 그것도 이틀이나 걸려서 독일 행 비행기를 타보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독일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광부와 간호사로 많이 갔었는데, 다들 고생들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내가, 우리 세대가 그만치 고생들을 했기 때문에 한국이 이만큼... 독일에 간호원들도 가서 얼매나 천대 받고 생활했는지 몰라요. 광부들도. 입을 것도 제일 싸구리 그런디 가서 사먹었지 좋은 것을 못 사 입었어요.”

그렇게 고생을 한 돈으로 처음에는 고향 정읍에 가서 농사도 지어봤지만, 이내 적성에 맞지 않아서 도시로 나왔단다. 그러다가 화순에서 방앗간을 하며 정착한 지 벌써 십칠년의 세월이 흘렀다. 박덕중 씨는 인생의 대부분을 광부로 살아왔다. 특히 화순 광업소에서의 경험은 그의 평생의 자산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보제공]

  • •  박덕중(남, 1943년생, 화순군 능주면 주민, 화순 광업소 퇴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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