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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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四大義兵將-崔慶會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다지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문안식 |
출생 시기/일시 | 1532년 - 최경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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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61년 - 최경회 생원시, 진사시 양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67년 - 최경회 문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최경회 의병 활동 |
몰년 시기/일시 | 1593년 - 최경회 사망 |
출생지 | 최경회 생가 - 전라남도 화순읍 삼천리 |
활동지 | 진주성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
활동지 | 남강 - 경상남도 진주시 강남동 |
[교우 관계 및 관직 경력]
최경회의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자는 선우(善遇)이고 호는 삼계(三溪), 일휴당(日休堂)이다. 최충(崔冲)의 후손이며 최혼(崔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윤범(崔尹範)이다. 아버지는 최천부(崔天符), 어머니는 순창(淳昌) 임씨(林氏)로 1532년 전라남도 화순읍 삼천리에서 태어났다.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과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30세인 1561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생원(生員)과 진사(進士) 양과(兩科)에 합격하고 36세[1567년]에 문과 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형조 좌랑(刑曹 佐郞) 등 내직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 옥구(沃溝)·장수(長水)·무장(茂長) 지역의 현감(縣監)을 거쳐 영암 군수(靈岩郡守)와 영해 부사(寧海府使), 담양 부사(潭陽府使) 등을 지냈다.
최경회는 지방 행정 업무를 잘 처리하였으며 백성들을 위한 선정을 베풀었다. 재임하였던 지방에서는 선정을 기리는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다. 영해 부사로 재직하던 시기에 주민들은 최경회의 선정에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생사당(生祠堂)을 만들어 영정(影幀)을 안치하였다.
[의병 봉기]
최경회는 60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화순 향제(鄕第)에 기거하였다. 이때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호남 지방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나주 지역의 김천일(金天鎰)과 담양 지역의 고경명(高敬命)이 의병을 일으켰다. 전자를 전라우도 의병이라 하였고 후자를 전라좌도 의병이라 하였다. 문홍헌(文弘獻)은 고경명 휘하에서 활동하였는데 고경명의 요청으로 지방[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지역]에 남아서 식량을 모으는 도중 금산에서 고경명 의병 부대의 패전 소식을 들었다. 이에 상중에 있던 최경회를 찾아가 의병 기병을 논의하였다.
최경회는 “이제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으니 내 몸을 나라에 바쳐도 된다. 부모에게 효도 하듯이 나라에 충성을 다 하겠노라”라고 말한 후 의병을 일으켰다. 백형(伯兄) 최경운(崔慶雲)과 중형(仲兄) 최경장(崔慶長)과 함께 향리(鄕里)에 의병청(義兵廳)을 설치하고 의병을 모았는데, 지금 화순읍 삼천리에 있는 고사정(高士亭)이다.
최경회는 모친 신위에 곡을 마치고 검은 상복 차림으로 단상에 올라 의병장이 되어 각 고을에 격문을 보냈다. 고경명 휘하에서 절의를 지킨 유팽로와 안영을 본받자는 내용이었다. 문홍헌의 활동으로 구희(具喜), 박혁기(朴爀起)와 오방한(吳邦翰), 김인갑(金仁甲) 등이 합류하였다. 화순과 능주를 중심으로 8백여 명의 의병들이 모여들었다. 최경회 삼형제와 조카 최홍재와 최홍우, 아들 최홍기 역시 의병에 참가하였다.
[무주 대첩]
최경회는 광주에서 맹주로 추대되고 그 부대를 ‘우의병(右義兵)’이라 하였다. 부대는 담양과 순창 등을 거쳐 남원에 이르렀다. 군사가 많이 충원되어 전부장(前部將)에 송대창(宋大昌), 후부장(後部將)에 허일(許鎰), 좌부장(左部將)에 고득뢰(高得賚), 우부장(右部將)에 권극평(權克平), 참모관에 문홍헌(文弘獻)을 임명하였다.
전라 우의병은 군사가 확충되자 남원에서 북상하여 한양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러나 금산과 무주 등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들이 전주와 남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호남 지역이 유린될 위기에 처했다. 전라 감사 권율은 최경회에게 현감으로 재직하였던 장수로 진군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의병을 이끌고 금산(錦山)과 무주(茂州) 등에서 왜군과 싸워 승리하였다.
최경회는 금산에서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우지치(牛旨峙)에서 접전을 펼쳤는데, 군사를 이동시킬 때 지리적 상황을 이용하였다. 효율적인 진법 운영과 매복 작전은 왜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왜군이 고개를 넘어 전주 방향으로 진격하는 것을 격퇴하여 후퇴하게 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를 무주 대첩이라 한다.
최경회는 왜군의 장수가 사용하던 큰 칼을 빼앗기도 하였다. 자루가 길고 칼날이 등쪽으로 휘어진 언월도(偃月刀)이며, 칼날에 ‘모루미치[盛道] 작(作)’이라는 만든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칼은 충의사에 보관되어 있는데 나무로 된 칼자루는 없어지고 길이 약 130cm의 칼날만 녹슨 채 남아 있다.
[제1차 진주성 전투]
최경회는 장수에서 남원으로 진을 옮겼다. 장수에는 더 이상 머무를 필요가 없었다. 그가 장수에서 왜군을 방어하여 전라도 진격을 차단하였기 때문에 왜군들이 경상도 방면으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최경회가 남원에 유진(留陣)하고 있을 때 영남 의병장 김면(金沔)과 경상우도 관찰사 김성일(金誠一)이 원군을 요청하였다.
최경회의 부장(部將)들은 “지금 적군의 기세가 사방으로 뻗치고 있는데 어찌 호남 지방을 버리고 멀리 영남우도를 구원해야 하느냐”며 구원 요청에 반대하였다. 최경회는 “호남도 우리 땅이요, 영남도 우리 땅인데 의(義)로써 일어난 사람들이 원근을 가리겠는가”라고 말하면서 경상도로 달려갔다.
최경회는 전라 우의병을 이끌고 진주 살천(薩川)까지 진출하여 1592년 10월 진주성 전투에 외곽 지원을 담당하였다. 임계영이 이끈 전라 좌우병도 함양으로 진출하였다. 태인 출신의 민여운(閔汝雲) 역시 의병 200여 명을 거느리고 왔다. 최경회는 왜군의 진주성 공격을 앞두고 경상도 산음(山陰)에 머물고 있던 경상우도 관찰사 김천일을 방문하였다.
최경회 의병 부대는 군사 1,000명을 이끌고 진주 살천창(薩川倉)에 주둔하게 되었다. 진주 목사 김시민은 최경회를 비롯한 여러 전라 의병장의 외원(外援)을 받아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들은 계속 경상도에 남아 왜적을 무찔렀다. 1593년 1월 중순에 조정에서는 서울 공략을 위해 최경회·임계영·곽재우의 의병 부대를 서울로 올라오게 하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경상도에서 전라도 의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상소가 잇따라 그 계획은 철회되었다.
[제2차 진주성 전투]
진주성 전투 승리 이후 영남 의병 김면과 전라 우의병 최경회의 합동 작전은 개령에서 왜군을 몰아내고 수복하는 개가(凱歌)를 올렸다. 김면은 고령 출신 의병장으로 왜적과 싸우다가 1593년 1월 경상우병사가 되었으나 3월에 전염병으로 사망하였다. 4월에는 경상우도 감사 김성일마저 전염병으로 쓰러졌다.
조정에서는 최경회를 경상우병사, 김늑을 경상우도 감사로 임명하였다. 최경회가 경상우병사가 된 데는 우여곡절이 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의병장 최경회는 무신은 아니지만 여러 번 전공을 세워서 명성이 크게 드러났고 재능도 책임을 감당할 만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거느리고 있는 호남의 의병은 이미 그와 서로 친숙해 있으니 사변이 안정될 때까지는 그대로 직을 맡겨도 되겠습니다’라고 하니, 상이 따랐다”라고 되어 있다.
1593년 6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10만 왜군이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 최경회는 병사 700명을 이끌고 창의사 김천일, 충청 병사 황진, 복수 의병장 고종후 등과 함께 진주성 사수에 나섰다. 영남 의병 부대를 이끌던 곽재우와 관군을 지휘하던 도원수 권율은 참전하지 않았다. 진주성의 수성을 위해서 진주 목사 서예원(徐禮元)과 김해 부사 이종인(李宗仁) 및 일부 영남 의병만이 참여하였다. 대부분의 군사는 전라도에서 모여든 의병이었다.
도원수 권율과 순변사 이빈, 전라 병사 선거이 등은 함안에 있다가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순변사 이빈은 영남 의병장 곽재우에게 진주성의 지원을 권했다. 그러나 곽재우는 이를 거부하였고 충청 병사 황진이 진주성에 입성하려고 하자, “진주성은 고성(孤城)이어서 지키기 어렵고, 그대는 충청도 절도사인데 진주성을 지키다 죽는 일은 맡은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홍진의 진주성 입성을 만류하였고, 그의 군사를 거느리고 정진(鼎津)으로 물러났다.진주성의 수성은 의병장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김천일이 우도 절제(右都節制), 최경회가 좌도 절제(左都節制), 황진이 도순성장(都巡城將)이 되었다. 김천일은 수성에 소극적이었던 진주 목사 서예원을 대신하여 장윤을 가목사(假牧使)로 삼았다.
진주성에는 전라 의병 약 3,000여 명과 진주목 내에 머물던 군사 1만 5,000여 명이 주둔하였다. 병사와 주민들을 포함하면 약 6~7만 명이 남아 있었다. 진주성의 의병과 군사는 10만에 이르는 대군의 공격에 맞섰다. 왜군의 대규모 공세에 외부의 지원 없이 수성군은 흔들림 없이 저항하였다.
적의 성벽 공격으로 성이 무너져 내리면 주민과 수성군이 합세하여 성을 복원하였다. 끈질기게 몰려드는 적을 적은 수로 막아내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전투가 발생한지 9일 만에 진주성이 무너졌다. 최경회는 조복 한 벌과 무주 싸움에서 왜장에게서 빼앗았던 보검, 공민왕이 그린 그림을 조카 최홍우에게 맡겼다. 이를 고향으로 돌아가 둘째 형 최경장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마침내 최경회는 김천일, 고종후와 함께 촉석루(矗石樓)에 올랐다. 최경회는 동향의 의병으로서 참여하였던 인물들과 촉석루에서 북쪽을 향해 재배하였다. 그곳에는 김천일과 고종후도 있었다. 최경회는 죽음을 앞두고 서사시(誓死詩)를 피맺힌 목소리로 읊었다.
"촉석루중 삼장사(矗石樓中 三壯士)[촉석루의 삼장사는]/ 일배소지 장강수(一杯笑指 長江水)[한 잔의 술로 웃으며 장강의 물을 가리킨다]/ 장강지수 유도도(長江之水 流滔滔)[장강의 물은 도도히 흘러가니]/ 파불갈혜 혼불사(波不渴兮 魂不死)[저 물이 마르지 않은 한 혼은 죽지 않으리라]"
최경회는 북쪽을 향해 4배를 한 후 인장과 병부를 가슴에 안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 김천일도 고종후도 강에 뛰어들어 순절하였다. 결국 최경회와 문홍헌을 비롯한 동향의 의병들은 죽음을 함께 맞이하였다. 그들은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1593년 6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는 최경회의 졸기가 실려 있다. “최경회는 동서로 적을 초토하느라 1년 넘게 노숙했으나 뜻이 조금도 태만해지지 않았다. 우병사로 승진되어서는 처사가 정밀하고 민첩했으며, 호령이 엄하고 분명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믿고 의지했다. 김천일과 함께 통수(統帥)가 되어 같이 있으면서 명령을 내렸는데 한 번도 상반되는 적이 없었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막사(幕士) 문홍헌 등과 함께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라고 하였다. 최경회는 진주시의 창렬사(彰烈祠)와 화순군 능주면 포충사(褒忠祠)에 제향되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최경회를 추모하는 유적으로 화순읍 다지리에 순조 때 건립한 최경회 사당이 있다. 능주면 잠정리에 있는 화순 능주 삼충각(三忠閣)은 최경회·문홍헌·조현(曺顯) 등 충신 3인의 충공을 기념하기 위해 1685년(숙종 11)에 세운 정려각(旌閭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