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2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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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內里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내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인철 |
개설 시기/일시 | 1914년 - 전라남도 화순군 내남면 내리 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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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시기/일시 | 1932년 - 전라남도 화순군 내남면 내리에서 남면 내리로 편입 |
전구간 | 내리 -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내리 |
성격 | 법정리 |
면적 | 9.09㎢ |
가구수 | 56가구 |
인구[남,여] | 188명[남자 100명, 여자 88명] |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화순군 남면 내리는 원래 삼산·밀양·대사골·중촌·평촌·신암 등 6개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중촌 마을은 폐촌되었다.
[명칭 유래]
내리는 동복현 내남면(內南面)의 첫 리(里)로 내남면(內南面)에서 내(內)자를 취하여 내리라 하였다. 삼산 마을은 마을에 샘이 있어 새미굴로 부르던 것이 ‘새미’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새는 숫자 삼(三), 미는 뫼[山]로 표기하여 삼산이라 하였다.
밀양 마을은 밀양사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밀양이라 하였다. 평촌 마을은 마을 뒤에 돌이 많아서 독자리[石村]로 불렀다. 이후 마을이 평지에 있다고 하여 평촌 마을이라 하였다.
대사골 마을은 원래 대나무가 많아 숲을 이루고 있어 대숲골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대사골이 되었다. 또한 대숲골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죽림(竹林) 마을이라 하였다.
중촌 마을은 가운데 마을이란 의미이다. 신암 마을은 예전에 이 마을에 샘이 있어 샘골로 불리던 것이 새암골이 되었다. 새암골을 한자화하면서 새 신(新)자와 바위 암(巖)자를 각각 취하여 신암(新巖)이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1789년 『호구 총수(戶口總數)』에는 동복현(同福縣) 내남면(內南面) 평촌(平村)으로 기록되어 있고, 1867년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동복현 내남면으로 기록되어 있다. 1895년(고종 32)에는 면·결·호수의 다소(多少)에 따라 각 군의 등급을 정하면서 나주부(羅州府) 동복군(同福郡) 내남면이 되었고 1896년(고종 33)에는 13도 실시에 따라 전라남도 동복군 내남면이 되었다. 1912년 『지방 행정 구역 명칭 일람』에는 동복군 내남면 평촌리(平村里)으로 기록되어 있고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화순군 내남면 내리[삼산리·밀양리·중촌·평촌·신암리·읍내면 둔동 각 일부]로 개편되었다. 1932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화순군 남면 내리에 편입되었다.
[자연환경]
내리는 화순군 남면 북동쪽 끝자락에 위치한다. 동쪽은 모후산[과 인접하고 서쪽에는 지방도 822호선이 지나고 있다. 동쪽에는 산지가 펼쳐지고 서쪽에는 한천리와 연둔리, 용리를 잇는 골짜기의 평지가 펼쳐져 있다.
밀양 마을의 동쪽에는 피박굴, 서쪽에는 참봉시암, 남쪽에 까박재, 북쪽에 뒷산이 있다. 평촌 마을의 동쪽에는 서당골이 있고 서쪽에는 양이산이 있으며 남쪽의 집앞들과 북쪽의 중보들이 있다. 평촌 마을의 동쪽에는 중촌 마을 터와 삼산 마을·밀양 마을이 있고 서쪽에는 신암 마을이 있다. 남쪽에는 다산리와 불무골 마을, 다공 마을이 있으며 북쪽에는 동복면 한천리가 있다. 신암 마을의 동쪽에는 평촌 마을이 있고 서쪽에는 동복천이 있으며 남쪽의 앞산과 북쪽의 와우산·갈너매가 있다.
[현황]
내리는 2012년 현재 총면적 9.09㎢에 56가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188명의 인구가 있는데 이중 남자는 100명이고 여자는 88명이다. 북쪽에는 구암리가 있고 남쪽은 다산리와 접하고, 서쪽에는 연둔리, 동쪽은 유마리와 접하고 있다. 주산물은 벼이고 특산물은 삼산·밀양 마을은 한우와 한봉이고, 평촌·대사골 마을은 한봉이며, 신암 마을은 한우이다. 삼산·밀양 마을의 주소득원은 벼와 한우이며, 평촌·대사골 마을은 벼와 한봉이며, 신암 마을은 벼와 한우이다. 유물 및 유적으로는 현감 이병교 선정비, 성원목 집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