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4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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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和順縣 |
이칭/별칭 | 복순현,순성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김희태 |
[정의]
940년부터 1895년까지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동면·이서면 일대를 관할하던 옛 행정 구역.
[개설]
화순현은 940년(고려 태조 23)에 여미현을 화순현으로 개칭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한 고을 이름이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1407년(태종 7)~1416년(태종 16)에는 복순현과 합속되었고, 1416년(태종 16)~1418년(태종 18)에는 순성현과 합속되었으며, 1594년(선조 27)~1611년(광해군 3)에는 전란으로 인해 능성현과 합속되기도 하였으나 조선 왕조 기간 동안 독립된 고을로 존재하였다. 1895년(고종 32) 5월 1일 전국을 23부제(府制)로 개편하면서 부·목·군·현의 고을 등급 구분을 군으로 통일했는데 이때 나주부 화순군이 되면서 화순현의 명칭이 화순군으로 계승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화순현은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지방 통치 체제 정비에 따라 지금의 화순 지역에 설치되었던 현이다. 삼국 시대 백제에서는 잉리아현, 통일 신라 시대에는 여미현이라 불렸고, 고려 시대에 화순현이라 한 이래 조선 시대 전 기간에 걸쳐 화순현이라 불렸다.
[관련 기록]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전라도 화순현(和順縣)조에 “본래 백제의 잉리아현(仍利阿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여미현(汝湄縣)으로 고쳐서 능성군(綾城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에서 화순현(和順縣)으로 고쳐서 나주(羅州)의 임내로 하였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남평(南平)을 겸하여 감무(監務)로 하였다. 본조 태조 3년 갑술(1394)에 나누어서 두 현(縣)으로 하고, 다시 동복(同福)으로써 감무를 겸하게 하였다가 태종 5년 을유(1405)에 동복현을 혁파하여 본 현에 합속(合屬)하고 화순 감무(和順監務)라고 칭하였고, 3년이 지나 정해에 복순(福順)이라 개칭(改稱)하였고, 16년 병신[1416]에 이르러 다시 동복을 나누어서 본현을 능성(綾城)에 합속(合屬)하여서 순성현(順城縣)이라 칭하였고, 18년(1418) 무술에 따로 본현을 두었다[本百濟 仍利阿縣 新羅改汝湄縣 爲綾城郡領縣 高麗改和順縣 爲羅州任內 恭讓王二年 兼南平爲監務 本朝太祖三年甲戌 分爲二縣 復以同福兼監務 太宗五年乙酉 革同福縣 合屬于本縣 稱和順監務 越三年丁亥 改稱福順 至丙申 復分同福 以本縣合屬于綾城 稱順城縣 戊戌 別置本縣].”라고 하였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 관찬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화순 건치 연혁조에는 “본래 백제 잉리아현이던 것을 신라가 여미(汝湄) 또는 여빈(汝濱)이라고 고쳐서 능성현(綾城縣)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고려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나주(羅州)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다시 능성현에 소속시켰으며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고 남평 현감을 겸임시켰다. 본조 태조(太祖) 3년에 이것을 쪼개서 두 현을 만들어 이에 동복 감무(同福監務)가 와서 겸임하게 했다. 태종(太宗) 5년에 동복(同福)을 없애고 본현(本縣)에 합쳐 소속시키고 화순 감무(和順監務)라고 일컬었고, 7년(1407)에 복순(福順)으로 고치고 16년(1416)에 다시 동복을 쪼개서 본현을 능성에 합쳐 소속시켜 순성(順城)이라고 일컬었으며, 18년(1418)에 각각 복구시키고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관찬 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 화순 건치 연혁조에는 “백제 잉리아현이던 것을 신라 때 여미 또는 여빈으로 고쳐서 능성군의 영현을 만들었다. 고려 때에 지금 이름인 화순으로 고치고 나주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다시 능성현에 복속시켰다. 공양왕 2년에 다시 감무를 두고 남평현(南平縣)을 겸임하게 하였다. 조선 태조 3년(1394)에 쪼개서 두 현을 만들어 동복 감무가 겸임하도록 하였다. 태종 5년(1405)에 동복을 없애고 본현(本縣)에 합쳐서 화순 감무라 일컬었다. 태조 7년에 복순으로 고치고, 태조 16년(1416)에 다시 동복을 쪼개고 본현을 능성에 합쳐 순성이라고 칭했다. 태조 18년(1418)에 다시 구례에 따라 현감을 두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땅이 협소하고 백성의 수가 적으며, 재력이 피폐해져 능히 독자적인 현으로 존립할 수가 없어서 선조 27년 갑오년(1594)에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다시 능성현에 합쳐서 복속시켰다. 광해군 3년 신해년(1611)에 현을 다시 두었다. 효종 7년 을미년(1656)에 동복현을 혁파하고 본현에 복속하였다. 현종 4년 계묘년(1838)에 예전대로 복구하였다[本百濟 仍利阿縣 新羅改汝湄[一云 汝濵] 爲綾城郡領縣 高麗 改今名 爲羅州 後還屬綾城縣 恭讓王二年 置監務 兼任南平縣 本朝 太祖三年 柝爲二縣 乃以同福監務 來兼 太宗五年 省同福 合屬于本縣 稱和順監務 七年 改稱福順 十六年 復析同福 以本縣合屬于綾城 稱順城 十八年 各復舊 例爲縣監 壬辰兵燹之後 地狹民殘物力凋弊 不能獨立 故宣廟二十七年 甲午 從民願 復合屬于綾城 光海三年 辛亥 復縣 後孝廟七年 乙未 革同福縣 合屬于本縣 顯廟四年癸卯復舊].”는 기록이 있다.
[내용]
화순현은 본래 백제의 잉리아현으로, 통일 신라 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여미 또는 여빈, 해빈으로 고쳐서 능성군에 딸린 현이 되었다. 고려 시대 940년(태조 23)에 화순현으로 고쳐서 나주에 병합되었다가, 후에 능성군으로 복구되었다. 1390년(공양왕 2년)에 감무를 두어서 남평현을 겸임하게 하였다.
조선 시대 1394년(태조 3)에 화순현을 분할하여 두 현을 만들어 동복 감무가 겸임하게 하였다. 1405년(태종 5)에 동복현을 폐지하고 화순현에 합속했다가 1407년(태종 7)에 복순현으로 개칭하였다. 1416년(태종 16)에 동복현은 독립하고 화순현은 능성현과 합해져 순성현(順城)으로 개칭되었는데 1418년(태종 18)에 순성현은 다시 화순현과 능성현으로 분리되었다.
화순현은 1594년(선조 27)에 전란으로 다시 능성에 편입되었다가, 1611년(광해군 3년)에 복구되어, 읍내(邑內)·동면(東面)·서면(西面)의 3개면을 관할하였다. 1655년(효종 6)에는 동복현의 전패가 불에 타서 동복현을 폐하고 화순현에 합했다가 1664년(현종 5) 다시 독립하였다. 1895년(고종 32) 5월 1일 나주부(羅州府) 관할 화순군으로 개편되면서 화순현은 화순군으로 계승되었다.
[변천]
고려 초기 940년(태조 23)에 화순현으로 처음 개칭하였고, 조선 시대에도 화순현으로 불렀다. 1405년(태종 5)에 동복현이 혁파되어 화순에 합해졌다가 1407년(태종 7)에는 복순으로 개칭되며, 1416년(태종 16)에 동복현은 독립되고 화순은 능성과 합해져 순성이라 칭해졌다. 1594년(선조 27)에는 능성현에 합해졌다가 1611년(광해군 3)에 복현되고 1618년(광해군 10) 다시 화순으로 분리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화순군이 되면서 화순현 고을명은 없어진다.
[의의와 평가]
화순현이라는 명칭은 940년(태조 23)에 개칭된 이래 1895년(고종 32) 5월에 화순군이 될 때까지 조선 시대 전 기간에 사용되었다. 이후 전라남도 화순군으로 승계되어 현재까지도 독립된 고을 격이 유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