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4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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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彦福-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문안식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615년 8월 22일 - 오언복의 난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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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지방관과 향리의 갈등 |
관련 인물/단체 | 오언복(吳彦福) |
[정의]
1615년 전라남도 화순 지역 동복현(同福縣)의 호장(戶長) 오언복(吳彦福) 등이 일으킨 난.
[역사적 배경]
동복현은 조선 시대에 현령이 파견된 지역이었다. 중앙에서 동복현에 파견된 현령은 향리의 보좌를 받아 지방을 통치하였다. 조선 시대 지방관의 주요 임무는 수령 칠사(首領七事)를 들 수 있다. 농상을 성하게 함[農桑盛], 호구를 늘림[戶口增], 학교를 일으킴[學校興], 군정을 닦음[軍政修], 역의 부과를 균등하게 함[賦役均], 소송을 간명하게 함[詞訟簡],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함[奸猾息]이 그것이다.
그러나 지방관과 향리 사이에는 대립과 갈등이 생겨 상호 충돌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동복 지역의 호장이었던 오언복 등이 패거리를 이루어 난을 일으킨 것은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과의 갈등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짐작된다.
[경과]
『광해군 일기』에는 1615년(광해군 7) 8월 22일 오언복 등이 무리를 모아 난을 일으키자 읍내 30여 집이 놀라 흩어져 텅 비게 되었다는 간략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외에 구체적 정황과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오언복 등이 소동을 일으킨 까닭은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과의 갈등 때문으로 추정된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 시대 호장은 고려 시대와 달리 중인층(中人層)으로 신분이 고정되는 등 신분 상승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들은 향리직의 수장(首長)으로서 조문기관(詔文記官)·장교 등과 같이 삼반 체제(三班體制)를 유지한 채 아전으로서 지방관의 제반 업무를 보좌하였다. 오언복이 패거리를 만들어 난을 일으킨 것은 동복현 출신 정순기(鄭順己)를 보름 전에 효수(梟首)한 것과도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