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5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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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平戰鬪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조광철 |
[정의]
1894년 12월 3일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동학 농민군이 인근 남평 관아를 공격해 점령한 사건.
[개설]
1894년 최경선(崔景善)[1859~1895]·손화중(孫華仲)[1861~1895]에 의해 시행된 나주 공략의 실패로 능주와 남평 일대에 흩어져 있던 동학 농민군은 남평 관아를 급습하여 잠시 동안 관아를 장악했다.
[역사적 배경]
1894년 9월부터 11월까지 나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동학 농민군의 나주읍성 공략이 최종적으로 실패함에 따라 농민군은 거의 와해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당시 농민군을 이끌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최경선은 광주 지역에 머무르며 사태를 관망하다가 화순 지역으로 들어왔고 농민군의 상당수도 능주와 남평 일대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최경선은 수백 명의 화순 지역 농민군을 규합하고 전열을 정비했다.
[경과]
최경선의 농민군은 12월 3일 남평 관아를 급습했다. 그들은 관아에 들어가 부금(符金)[부절과 인장]를 빼앗고 관리들을 내쫓았으며 이 과정에서 남평 군수 이희하(李熙夏)가 어깨에 총상을 입고 달아났다. 이 사실은 남평 수리(首吏) 정수홍에 의해 나주의 수성군에 전해졌고 수성군은 곧 포병 300여 명과 민보군을 남평에 급파했다.
이들이 온다는 소식에 농민군은 맞대응을 피하고 남평 읍내를 빠져나와 능주를 거쳐 흩어진다. 일부는 장흥 지역으로 향했고, 최경선과 일부 농민군은 동복현 방면으로 후퇴했다. 이들은 남평 읍내에서 길을 따라 약 30km 떨어진 지금의 화순군 남면 벽송리에 머물렀다.
[결과]
장흥 방면으로 간 농민군은 이후 장흥 및 강진 지역의 전투에 참여했다. 장흥부와 벽사역을 점령하고 강진 관아와 전라도 병영의 공격에 가담했던 것이다. 반면에 최경선과 일부 농민군은 주로 동복현 벽송리[현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 벽송리] 지역에 머물렀는데 그중 상당수는 현장에서 민보군에 의해 총살되거나 압송되었다. 최경선도 벽송리에 은신하던 중에 밀고에 의해 생포되었다.
[의의와 평가]
남평 관아의 점령에도 불구하고 화순 지역 농민군의 전력은 이전과 비교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때문에 나주 수성군의 반격 소식을 듣고 맞대응을 피한 채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