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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512
한자 民族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조광철

[정의]

일제 강점기에 전라남도 화순 지역에서 전개된 항일 민족 운동.

[개설]

화순 지역의 민족 운동은 3·1 운동 전까지 1900년대 항일 의병 운동의 흐름과 단절된 채 침체기를 겪었다. 그러나 3·1 운동을 통해 민족 운동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일어났고 1920년대에 활발한 민족 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민족 운동은 초기 청년 단체 중심에서 농민과 노동자 계층으로 빠르게 확산되었고, 이념적으로는 대중 계몽과 교화라는 시혜적인 관점에서 민족 운동의 동력을 기층 농민과 노동자에서 찾으려는 태도로 바뀌었다.

민족 운동은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1930년대에 침체기로 접어들었으나 당시에 거둔 민족 운동의 경험은 광복 이후 화순 지역의 정치 지형에 큰 영향을 끼쳤고 지역민의 정서적 통합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3·1 운동]

일제 강점 이후 20여 년 간 화순 지역의 사회 조직은 크게 변모하였다. 전통적 여론 주도층인 양반 계층은 몰락하였고 향리 출신이 신흥 세력으로 부상했으나 아직 사회적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종전의 화순·능주·동복 지역은 화순군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으나 사회적 교류는 여전히 종전의 분산적인 구심점을 무대로 이루어졌다. 험준한 산악 지형으로 내부 소통은 원활하지 못하였고 철도와 같은 근대 교통도 아직은 등장하지 않았다.

만세 운동은 이런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전개되었다. 3월 13일 능주 장터에서 첫 만세 운동이 일어났고 이후에도 3월 중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다. 만세 운동은 대부분 10대 소년들이 주도했고 규모가 작았으며 단속적으로 일어났다. 반면에 운동을 견인할 지식인들은 인근 도시인 광주 지역의 만세 운동에 집중하느라 화순 지역에 손 쓸 겨를이 없었다. 조선인이 다니는 정규 학교도 화순군 전체를 통틀어 4곳에 불과했고 학생 수도 적어 운동의 외연을 확장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청년 운동]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화순 지역의 민족 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1920년대 민족 운동을 주도한 것은 청년 운동가들이었다. 청년 운동가들은 1900년대 이후 출생하여 대부분 보통 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아 어느 정도 근대 문화에 친숙한 이들이었다.

청년 운동가들은 1920년 결성된 화순 청년회·능주 청년회·동복 청년회에서 초기 활동 경력을 쌓았다. 화순 청년회·능주 청년회·동복 청년회는 초창기만 해도 중장년의 유산 계층이 주도했고 친목 단체의 성격이 강했으나 점차 청년 운동가들의 노력에 힘입어 야학과 강연회 등을 개최, 지역 사회와의 교감을 늘려가고 민족 운동의 인적 자원을 양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초기 운동가 중 일부는 1925년을 전후로 점차 사회주의 성향을 갖게 되었다. 능주 지역에서는 이런 성향의 단체로 능주 노농 청년회가 결성되었고, 화순 청년회도 점차 초기의 친목 단체 성격을 벗어나 사회주의 성향의 단체로 변모했다. 동시에 화순 지역·능주 지역·동복 세 지역, 혹은 면(面) 단위로 분산되어 활동하던 단체들은 1928년 화순 청년 동맹의 발족과 함께 운동 역량을 결집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 사회주의자들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청년 운동은 크게 위축되기 시작했다. 화순 지역에서 청년 운동은 다른 민족 운동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터라 청년 운동의 위축은 지역 전체의 민족 운동을 위축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농민 운동]

1920년대에 전국적으로 소작 분쟁이 급증한 가운데 화순 지역에서도 분쟁이 빈발하였다. 화순 지역은 같은 시기의 전라남도 지역과 비교해서도 농민의 경제적 상황이 열악했다. 농가의 90%가 어떤 형태로든 소작 관계에 얽혀 있었고 순수 소작 농가만 전체 농가의 60%에 달했다. 지역 사회와의 유대가 낮은 부재 지주가 많았던 것도 소작 분쟁을 촉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소작 분쟁은 농민과 청년 지식인들이 사회적 결합을 촉진시켰다. 이 시기 두 계층의 결합을 통해 1924년 능주 노농회·1926년 능주 농민회·1926년 화순 농민 조합·1926년 외남 농민회·1927년 소작권 피박탈자 동맹·1928년 외남 농민 조합·1929년 능주 농민 조합이 결성되었다.

농민과 청년 지식인들로 구성된 단체들은 단순히 소작농의 권익뿐 아니라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 의식을 확신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민족 운동으로서 의의가 있다. 1920년대 중반 이후로는 노동 운동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어 노동조합이 결성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이후의 민족 운동]

화순 지역의 민족 운동은 1929년 광주 지역에서 일어난 학생 독립운동에 지역 출신 학생들이 독서회 활동과 시위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 말 민족 운동을 견인한 청년 운동가들이 대거 일제에 검거되면서 침체기를 겪었다. 이러한 침체의 발생은 일제 탄압의 강화뿐 아니라 지역의 민족 운동이 특정 계층, 즉 청년 운동가들에게 크게 의존해 온 점에도 원인이 있었다. 또한 일제가 농민들의 운동 역량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춘궁기에 낮은 이율의 곡식을 제공하는 사환미 사업, 각종 토목 사업에 일자리를 제공하는 궁민(窮民) 구제 사업 등을 펼친 영향이기도 했다. 민족 운동의 침체는 8·15 해방 직전까지 계속되었고, 점차 지하화하면서 그 명맥을 유지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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