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5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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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現代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광철 |
[정의]
1945년 8월 광복 이후부터 현재까지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역사.
[해방 직후의 화순]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 소식이 전해지자 화순 지역은 광복을 맞이할 준비에 착수했다. 8월 15일 화순 지역의 주요 인사들은 독립 운동가 주재학의 집에 모여 적산 관리와 치안 유지 등을 논의했고 그 흐름이 건국 준비 위원회 화순 지부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건국 준비 위원회 화순 지부는 10월 초 좌익 성향의 인민 위원회로 재편되었고 이때부터 좌우익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1945년 말부터 미군정이 시작되며 더욱 악화됐다. 1946년 해방 1주년 기념행사 사건[일명 너릿재 사건]과 화순 탄광 파업 그리고 메이데이 사건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좌우익 갈등이었다.
[좌우익의 충돌과 6·25 전쟁]
화순 지역에서 좌우익의 갈등이 폭력적으로 변모한 결정적 계기는 1948년 여순 사건 때 좌익 반군이 화순 지역의 험준한 산지로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좌익 반군은 화순군의 산악 지대를 은신처로 삼았고 이후 6·25 전쟁 중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과 지역 좌익이 다시 입산하면서 화순군의 산악 지대는 빨치산과 빨치산을 토벌하려는 군경의 첨예한 대치 장소가 되었다.
본래 화순 지역은 좌익세가 유달리 강했던 것이 아니었음에도 1955년까지 양측의 교전이 빈발했고 민간인들의 피해가 컸던 것은 화순 지역 면적의 70%에 차지하는 백아산과 모후산 등의 산지를 빨치산이 활동 거점으로 삼아 토벌의 강도가 커진 데 따른 결과였다. 화순 지역에서 빨치산 토벌은 휴전 협정을 맺고도 2년이 지난 1955년에야 종결되었다.
[인구의 유출]
광복과 미군정, 6·25 전쟁을 거치는 동안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경제적 기반은 이전과 다름없이 농업이었다. 농업을 기반으로 인구 10만 명 선을 유지하던 화순군은 1950년대 중반 이후 베이비 붐 현상에 힘입어 1966년에는 15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다시 감소세로 돌아서 1984년 10만 명 선이 붕괴됐고 1990년대 9만 명~7만 명 선으로 유지하다가 2000년대 이후 6만 명 선으로 줄어들었다. 이러한 인구 감소는 주로 농촌 인구의 유출에 따른 결과로 이해된다.
화순 탄광과 호남 탄좌 등이 있었던 화순군 동면·이양면·한천면은 광부들로 인해 사정이 달랐다. 화순 탄광 소재지인 동면의 인구가 화순읍 다음으로 많은 것도 이러한 이유다. 그러나 석탄 수요의 감소와 1993년 호남 탄좌의 조업 중단 등으로 화순군 전체의 인구 감소 추세를 반전시킬 수 없었다.
[광주시와 공유한 역사적 경험]
화순 지역은 오랫동안 광주 지역과 역사적 경험을 공유해 왔다. 20세기에 들어서도 1900년대 항일 의병들은 화순 지역과 광주 지역을 넘나들며 활동했고, 1919년 광주 지역의 3·1 운동에 화순 군민들 다수가 참여하였다. 1929년 광주 학생 독립 운동 때에는 화순 지역 출신 학생들이 독서회 활동과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으로도 이어졌다. 특히 5·18 민주화 운동 때 화순 군민들은 광주 지역과 깊은 연대감을 보여 주었다. 광주 지역에서 온 시위대에 호응하는 집회를 열었고 직접 광주 지역의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동면 경찰 지서와 화순 탄광 등지에 있던 무기를 광주 지역 시민군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기를 광주 지역 시민군에게 전달하기 위해 너릿재 터널을 넘던 버스가 계엄군의 총격을 받는 등 희생자가 다수 발생하기도 했다.
[화순읍의 성장]
화순군과 광주광역시는 하나의 생활권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2000년대에 들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의 인구 증가다. 군 전체의 전반적인 인구 감소세와 달리 화순읍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해 왔다. 1962년 화순면이 화순읍으로 승격된 후 줄곧 2만 명 선을 유지했던 화순읍은 1996년 3만 명, 1999년 4만 명을 돌파했다. 화순읍의 예외적인 인구 증가는 화순읍이 광주광역시의 침상 도시로 변모한 데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구와 일상생활을 지나치게 광주 지역에 의존하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자칫 화순군의 사회적 정체성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 내부의 위상 변화]
화순군 화순읍의 성장은 지역 내부의 위상에도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오늘날 화순군은 1914년 화순·능주·동복으로 나뉘어 있던 고을을 묶어 하나로 통합하면서 생겨났다. 그러나 세 지역을 통합했음에도 불구하고 화순군의 사회 생활은 상당 부분 세 지역간 분산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모습은 인구 분포에서도 엿보인다. 1990년대 초만 해도 화순읍 일원의 인구는 3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40% 정도에 불과했고, 7개면으로 이루어진 능주 지역에 40%, 4개면으로 이루어진 동복 지역에 20% 정도가 거주했다. 그런데 2012년 현재 화순읍에는 전체인구의 60%가 모여 살고 있다. 이는 지역 안에서 화순읍의 위상이 증대되고 있음을 말해 주는 동시에 사회 기반 시설의 편중, 능주 지역과 동복 지역의 상대적 침체와 정체성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화순군의 사회 발전은 지역 편중성을 완화하고 도농 복합 도시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