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8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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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斗南 |
이칭/별칭 | 득일(得一),북애정(北涯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권수용 |
출생 시기/일시 | 1578년 - 양두남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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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03년 - 양두남 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04년 - 양두남 언양 현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08년 - 양두남 비인 현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22년 - 양두남 언양 현감으로 탄핵됨 |
활동 시기/일시 | 1627년 - 양두남 정묘호란 때 창의 |
몰년 시기/일시 | 1640년 - 양두남 사망 |
거주|이주지 | 북애정(北涯亭) -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죽청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제주(濟州) |
대표 관직 | 판관 |
[정의]
조선 후기 화순 출신 무신.
[가계]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득일(得一), 호는 북애정(北涯亭).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양제용(梁濟容)이고, 어머니는 광산인 김잠(金潛)의 딸이다. 여흥인 민숭경(閔崇慶)의 딸과 혼인하였다.
[활동 사항]
양두남(梁斗南)[1578~1640]은 화순 출신으로,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여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비변사 낭청(備邊司郎廳)과 사헌부 감찰 등을 거쳐 1604년(선조 37)에는 언양 현감(彦陽縣監)에, 1608년(선조 41)에는 비인 현감(庇仁縣監)에 제수(除授)되었고, 안동 대도호부 판관(安東大都護府判官)을 역임했는데, 가는 곳마다 치적이 있었다.
특히 비인에서는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그의 치적을 기리기까지 하였다. 『광해군일기』 1622년(광해군 14) 6월 11일 조에는 언양 현감(彦陽縣監)으로서 농사철에도 백성들을 부려 자신을 살찌우는 데만 힘써 백성들이 모두 유망(流亡)하였다고 파직된 기록이 있다. 1627년(인조 5) 비인 현감이 되고 정묘 호란(丁卯 胡亂)이 일어나자 삼종형 구봉 양위남(梁渭南)과 창의하여 담양의 군병을 인솔하여 참전하였다. 이 같은 사적은 당시 전라 감사의 포계(襃啓)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묘소]
묘는 전라남도 능주군 백아면 하덕곡 장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