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9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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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永灝 |
이칭/별칭 | 정영진(鄭永珍),경하(景河),남파(藍坡)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수용 |
출생 시기/일시 | 1856년 - 정영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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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75년 - 정영호 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정영호 고광순과 의병 모집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정영호 연곡사 전투에서 체포됨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정영호 6년형 선고 |
몰년 시기/일시 | 1919년 - 정영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7년 - 정영호 건국 포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정영호 건국 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정영호 출생지 -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면 원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본관 | 경주(慶州) |
[정의]
한말 화순군 백아면 원리 출신의 의병.
[개설]
1907년에 고광순(高光洵)의 의병 부대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일을 하였으며, 1908년 연곡사 전투에서 체포되어 6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하(景河), 호는 남파(藍坡). 계림군(鷄林君) 정효상(鄭孝常)의 후손으로, 현감 정약이(鄭樂易)의 6세손이고, 아버지는 모암(慕庵) 정정현(鄭貞鉉)이다.
[활동 사항]
정영호(鄭永灝)[1856~1919]는 평소에 의분심이 투철하였다. 1875년(고종 12)에 무과에 급제하여 부호군 겸 오위장이 되었으나 국운이 쇠퇴하자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7월 좌도 의병장 고광순(高光洵)이 의병을 모집하자 1908년(융희 2) 8월 8일 박경선(朴京善)·강원숙(姜源淑)·박화중(朴化中)·김산안(金山安) 등 4명을 고광순의 의진에 인도하는 한편 조진규(趙晋奎)가 소유하고 있던 총 1정을 강원숙에게 건네주는 등 의병 운동을 적극 도왔다. 1908년에 연곡사 전투에서 체포되어 9월 30일 광주 지방 재판소에서 유형 5년형을 선고 받고 공소하였으나, 11월 7일 대구 공소원에서 그대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손자 정병의(鄭炳儀)는 조부의 영향을 받아 1936년 5월 16일 일본 왕을 모독한 혐의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에 건국 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