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11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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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漢默 |
이칭/별칭 | 길중(吉仲),경조(景朝),지강(芝江)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한규무 |
출생 시기/일시 | 1862년 4월 29일[음] - 양한묵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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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95년 - 양한묵 탁지부 주사 임명, 능주군 세무관으로 근무 |
활동 시기/일시 | 1902년 - 양한묵 일본 나라에서 동학 입교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 양한묵 헌정 연구회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양한묵 천도교 중앙 총부 집강 진리 과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양한묵 대한 자강회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양한묵 대한 협회·호남 학회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양한묵 천도교 중앙 총부 현기사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09년 12월 - 양한묵 이재명의 이완용 암살 미수 사건 연루, 체포됨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양한묵 천도교 법도사·진리관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12년 - 양한묵 교리 강습소 개설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2월 27일 - 양한묵 독립 선언서에 민족 대표로 서명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일 - 양한묵 독립 선언식 참석, 체포됨 |
몰년 시기/일시 | 1919년 5월 26일 - 양한묵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20년 5월 22일 - 양한묵 상해 거류 민단 주최로 순국 제열 추도회 거행 |
추모 시기/일시 | 1992년 - 양한묵 건국 훈장 대통령장 추서 |
출생지 | 양한묵 출생지 - 전남 해남군 옥천면 영계리 |
거주|이주지 | 양한묵 이주지 - 전남 나주군 산포면 송촌 |
거주|이주지 | 양한묵 거주지 - 전남 화순[능주] |
활동지 | 양한묵 활동지 - 전남 화순[능주] |
묘소 | 양한묵 묘소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 산126 |
추모비 | 양한묵 추모비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광덕리 남산 공원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3·1운동 민족 대표 |
[정의]
1919년 3·1 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으로 화순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제주. 자(字)는 길중(吉仲)·경조(景朝), 호(號)는 지강(芝江). 아버지는 양상태(梁相泰)이고 어머니는 낭주 최씨(郎州崔氏)이고 부인은 풍산 홍씨이다.
[활동 사항]
양한묵(梁漢默)[1862~1919]은 1895년 탁지부 주사가 되어 1895년 능주에서 세무관으로 근무하였다. 1897년 사직한 뒤 중국 베이징을 방문하였으며, 1898년 일본으로 건너가 문물을 시찰하던 중 1902년 나라[奈良]에서 망명 중인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을 만나 동학(東學)에 입교하였다.
1904년 귀국한 양한묵은 보안회(輔安會)의 서기를 맡았으며, 1905년에는 이준(李儁)·윤효정(尹孝定) 등과 헌정 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8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1906년 1월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과 함께 귀국하였으며, 서울에 천도교 중앙 총부가 창립되자 집강 진리 과장(執綱眞理課長)[1906]·현기사장(玄機司長)[1907] 등의 직책을 맡았다. 또 그는 1906년 설립된 대한 자강회(大韓自彊會)와 1907년 설립된 대한 협회(大韓協會)·호남 학회(湖南學會) 등에도 가입하여 애국 계몽 운동에 참여하였다.
1909년 12월 이재명(李在明)의 이완용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나자 체포되었으나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이후에는 천도교 포교에 주력하여 법도사(法道師)[1910]·진리관장(眞理觀長)[1910]·직무 도사(職務道師)[1911] 등을 역임하였다. 1912년 그는 교리 강습소를 개설하여 천도교인 500여 명을 교육시키면서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양한묵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도곡으로 이주하여 천도교 도사(道師)로서 활동하였다. 1919년 2월 21~23일 독립선언계획을 알게 되었으며 25일 천도교 중앙 총부 권동진으로부터 거사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다. 2월 27일 양한묵은 김상규(金相奎)의 집에서 민족 대표로 서명하였으며,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 선언식에도 참석하였다. 투옥되어 극심한 고문을 받고 그해 5월 26일 56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저술 및 작품]
『천도교 대헌(天道敎大憲)』, 『도경(道經)』, 『교우 자성(敎友自省)』, 『천도교문(天道敎門)』, 『현기 문답(玄機問答)』, 『동경 연의(東經演義)』, 『무체법경(無體法經)』 등이 있다.
[묘소]
1919년 순국 직후 서울 수철리[현 금호동]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22년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 선영으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정부는 1962년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