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21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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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光祖 |
이칭/별칭 | 효직(孝直),정암(靜菴),문정(文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덕진 |
[정의]
조선 전기 화순으로 유배 온 문신.
[개설]
조광조는 아버지의 임지 평안도 희천에서 유배 중인 김굉필 문하에서 수학한 후 성리학 연구에 힘을 써 왕도 정치를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개혁 정치를 주도하다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치 사상은 16세기 도학 사상가들에 의해 계승·발전되었다.
[가계]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菴), 시호는 문정(文正). 개국공신 조온(趙溫)의 5대손이며, 감찰 조원강(趙元綱)의 아들이다.
[활동 사항]
조광조(趙光祖)[1482~1519]는 김굉필 문하에서 수학한 후, 1510년(중종 5)에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515년에 알성시에 급제하여 전적, 감찰, 예조 좌랑을 역임하였다.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에 입각한 왕도 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여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대사헌에 오른 1518년 4월에는 현량과를 실시하여 자기 세력의 신진 사림을 요직에 진출시켰고, 10월에는 연산군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들을 정국공신에서 제외하자는 위훈 삭제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중종의 반대 속에서 공신 개정이 추진되고 있던 1519년 11월 15일에 훈구 대신 남정·심곤의 사주에 의해 조광조를 비롯한 그의 추종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 사건이 이른바 기묘사화이다.
중종은 조광조를 전라도 능성[현재의 화순]으로 유배 보냈다가 12월에 사사(賜死)시켰고, 그를 따르던 인사들을 줄줄이 유배·파직·사형시켰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는 『정암집』이 있다.
[묘소]
양팽손은 조광조 시신을 염습(殮襲)한 후, 큰 아들 조응기로 하여금 중조산(中條山)에 묻도록 하였고, 그 아래에 띠집을 짓고 문인들과 제자들에게 춘추로 향사하게 하였다. 묘는 이듬해 1520년 봄에 용인 심곡리의 선산[현재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산55-1]에 안장되었다. 향사단은 1570년(선조 3)에 당시 능성 현령 조시중(趙時中)이 협찬하여 한천면 모산리 현 위치로 옮겨 건물을 짓고 ‘죽수(竹樹)’란 사액(賜額)을 받았다.
[상훈과 추모]
조광조는 1568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667년(현종 8)에 당시 능주 목사였던 민여노(閔汝老)가 조광조가 유배 생활을 했던 곳에 정암 조 선생 적려 유허 추모비(靜菴趙先生謫廬遺墟追慕碑)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