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A02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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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마을/마을 이야기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야사 마을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지용 |
나경적 출생 | 1690년 - 호남실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나경적이 1690년 출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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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적 자명종 및 기형혼천의 등을 제작 | 1759년 - 나경적 자명종 및 기형혼천의 등을 제작하였다. |
나경적 사망 | 1762년 - 나경적은 실학자로서 수리, 과학 등에 능통하였고, 많은 기술적 시도와 성과를 남겼다. |
나경적 자전마자전수차 소실 | 1950년 6월 25일 이후 - 나경적의 자전마자전수차는 후손에 의해 보관되어 오다가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 |
마을지 | 나경적 생가터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
[호남 실학의 선구자, 나경적]
야사 마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호남 실학에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들이 있는데 바로 석당 나경적(羅景績)[1690~1762]과 규남 하백원(河百源)[1781~1844]이다. 이 둘은 조선 후기 농업과 상공업의 한계성과 모순 등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실학에 대한 뜻을 호남에서 누구보다도 선구적으로 이끌었던 인물들이다.
나경적은 1690년에 야사 마을에서 태어나서 1762년에 생을 마감하였으며 자명종을 비롯한 많은 발명품을 만들었던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나경적에게는 과학자, 기술자 등의 수식어를 붙인다. 하지만 호남 실학의 선구자라는 말이 그를 설명하는데 더 정확한 수식어라 할 수 있다. 나경적은 실사구시, 이용후생을 추구하였고 실학자로서 수리, 과학 등에 능통하였으며 많은 기술적 시도와 성과를 남겼다. 그는 ‘기형혼천의(璣衡渾天儀)’, ‘측관의(測管儀)’, ‘구고의(勾股儀)’ 등을 제작하였고 ‘자전마자전수차(自轉磨自轉水車)’와 ‘자명종’을 만들어 실학의 실천적 의지를 현실화한 인물이다. 나경적의 ‘자전마자전수차’는 후손에 의해 보관되어 오다가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하백원의 증조부 하영청과 교유하다]
나경적은 하백원의 증조부인 하영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하영청의 문집인 『병암유집(屛巖遺集)』에 의하면 나경적과 함께 힘을 모아 마을의 자제들을 교육할 수 있는 강당을 마련하였고, 강론회, 사연(社宴), 꽃놀이 등의 취미를 즐기며 친밀한 관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하영청은 나경적이 기형혼천의(璣衡渾天儀)를 완성했을 때 “오랜 궁리가 있고 비용이 생겨 만들어진 기형혼천의는 오래도록 세상에 유용한 밑천이 될 것이며 그 이름이 오래 남을 것이다.”고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였다고 전한다. 홍대용이 서울에서 나경적의 부음을 듣고 조의를 전하는 편지를 하영청의 아들인 하정철에게 보내왔을 정도로 나경적과 하영청 가의 친분은 두터웠다. 이처럼 두 집안의 친분으로 인해 전해온 기록물들은 하영청의 증손인 하백원의 실험과 실용정신에 영향을 미쳤다. 훗날 하백원은 나경적이 제작한 자명종의 단점을 보완한 자명종을 제작할 수 있었다.
“우리 마을에 ‘나경적’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옛날에 자명종시계도 만들고 날씨 알아보는 것도 만들었다네. 그것들이 농촌에서 얼마나 중요한 건데! 훌륭한 분이제. 그리고 하백원선생도 그분한테 영향을 받아다여.” (이순준)
[홍대용과의 교유와 기형혼천의]
조선 시대에도 시간과 천문을 읽는 것에 대한 관심은 높았으며 그 연구 또한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연구는 나날이 변화와 발전을 거듭했으며 전라도 깊은 산골마을인 야사 마을에서도 나경적이라는 재야의 과학자에 의해 진행되었다.
나경적이 만들어낸 서양식 시계인 자명종(후종候鍾)과 서양식 천측기인 기형혼천의는 그의 가장 큰 업적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나주 목사의 아들이었던 홍대용이 무등산을 유람하고 나서 동복 물염정 근처에 살고 있던 나경적을 찾아왔는데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여 자명종을 정밀하게 제작하여 활용하고 있는 것을 보고 탄복하였다고 한다. 이 둘의 첫 만남은 서로가 관심을 갖고 있던 기형혼천의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수년 동안 연구하여 제작방법을 이뤄놓고도 제작비용이 없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한 나경적의 고충을 들은 홍대용은 자신 또한 일찍부터 혼천의에 관심이 있었음을 말하며 제작비용을 지원하였고 이렇게 하여 기형혼천의가 탄생한 것이다.
홍대용은 나경적이 만든 기형혼천의에 대해 “쇠로 만들고 서로 연결하여 하늘의 둥근 모양을 이루었다. 가운데로 둥근 쇠를 걸어 땅의 모양을 나타내고, 사방에 24방위와 사계절에 해와 달이 운행하는 길을 표시하였다. 또 둥근 쇠를 붙여 해와 달의 모양을 형상하여 날의 길고 짧음과 달의 그믐, 초하루, 상현, 하현, 보름을 살필 수 있게 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후 홍대용은 이 기형혼천의를 고향으로 가져가 농수각을 짓고 보관하였으며 농수각은 일종의 천문대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과학적 사고와 연구로 많은 업적을 남긴 나경적은 후대의 실학자들에 영향을 주었으며 야사 마을의 실학을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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