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0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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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공식명칭 | 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병호 |
[정의]
고대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전라북도 익산의 역사.
[개설]
익산은 백제 때 금마저(金馬渚)로 불렸으며, 무왕 대에는 왕궁과 미륵사가 건립되었다. 백제 멸망 후 보덕국(報德國)이 잠시 설치되었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는 금마군(金馬郡)으로 바뀌어 고려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금마군은 1344년(충혜왕 복위 5) 원나라 순제 황후 기씨(奇氏)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익주(益州)’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조선 태종 때 ‘익산(益山)’이라는 지명으로 바뀌었다.
[고대]
익산 지역에서 백제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 익산 입점리 고분[사적 제347호]과 웅포리 고분군[전라북도 기념물 제98호]이다. 특히 입점리 1호분에서는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재갈·등자·행엽 등의 마구류와 중국제 청자 등이 출토되었다. 입점리 1호분의 조성 시기에 관하여 웅진 천도 이전인지 이후인지 여러 논란이 있지만 5세기 4/4분기를 전후한 것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금동제 관모를 착용한 입점리 1호분의 피장자에 관하여 백제 중앙의 고위귀족이거나 『양서(梁書)』 백제전에 “백제는 전국에 22개 담로를 두고, 왕자나 왕족을 보내 다스리게 하였다.”라는 기록에 나오는 22담로의 하나로 보는 견해가 있다. 입점리에서 백제 중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돌방무덤이나 금속공예품, 중국제 청자가 발견된 배경에 대하여서는 금강에 접해 있어서 수로 교통의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백제사에서 익산이 가장 부각된 것은 7세기 무왕 대이다. 문헌 기록에 따르면 무왕은 어린 시절 익산에서 살았으며, 무왕 어머니의 근거지가 익산으로 나온다.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익산을 백제의 ‘별도(別都)’라고 하였지만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는 “백제 무광왕 때 지모밀지(枳募蜜地)로 천도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무광왕’은 무왕, ‘지모밀지’는 금마저(金馬渚)의 별칭이다. 무왕대 익산에 새로운 왕도가 조영되었을 것으로 보는 고고학적 증거로는 왕궁이 있었던 익산 왕궁리 유적과 방어시설인 익산토성[오금산성], 종교적 성지인 익산 미륵사지와 제석사지, 왕릉인 익산 쌍릉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익산의 백제 유적들은 무왕 대에 본격적으로 조영되어 ‘왕도’로서의 위용을 갖추게 하였다. 특히 장방형의 궁장 안에 대형 건물지와 정원, 공방 등이 정연하게 배치된 익산 왕궁리 유적과 3개의 탑과 3개의 금당이 나란히 배치된 3원식 가람배치가 드러난 우리나라 최대의 사찰이 있었던 익산 미륵사지는 이를 가장 잘 보여 준다.
[보덕국과 통일신라]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668년 금마에 보덕국(報德國)을 세우고 고구려 유민인 안승(安勝)을 보덕국왕으로 임명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반란을 구실로 683년 보덕국을 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보덕국이 군의 치소에서 서쪽으로 1리[0.393㎞]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하며, ‘금마저’라는 지명이 새겨진 오금산성이 그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 금마군(金馬郡)으로 개칭되어 옥야현을 영속시켰으며, 감물아현을 함열현으로 고쳐 임피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또 백제 시대 알야산현을 야산(野山), 소력지현을 옥야현으로 고쳐 금마군의 영현으로 삼고, 지량초현(只良肖縣)을 여량현(礪良縣)으로 고쳐 덕은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금마군은 옥야·야산·우주(紆洲) 등 3개 현을, 임피군은 함열·옥구·회미 등 3개 현을, 덕은군은 시진(市津)·여량·운제(雲梯) 등 3개 현을 각각 영현으로 거느렸다.
[후백제와 고려]
892년 무주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견훤은 후백제의 정통성을 백제, 더 나아가 마한과 연결시켰다. 갈양사 혜거국사비에는 922년 ‘미륵사 개탑(開塔)’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은 단순히 미륵사 탑을 열었다는 것이라기보다는 미륵사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를 시사하는 것으로 견훤이 백제를 계승한 것을 대내외에 표방하기 위한 행위로 생각할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금마군·여량현·낭산현·함열현·옥야현·도내산소(道乃山所) 등의 군현이 전주목(全州牧) 관할 하의 속군현으로 있었다. 1012년 거란의 침입으로 현종이 나주로 파천할 때 여량(礪良)을 거쳐 남행하였다. 금마군은 1344년(충혜왕 복위 5) 원나라 순제 황후 기씨(奇氏)의 외향이라 하여 익주(益州)로 승격되었다. 심곡사 칠층석탑에서는 고려 말 라마 양식 불상의 영향을 받은 금동불[보물 제1890호 익산 심곡사 칠층석탑 출토 금동불감 및 금동아미타여래칠존좌상(益山深谷寺七層石塔出土金銅佛龕및金銅阿彌陀如來七尊坐像)]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조선과 근대]
조선 시대인 1413년(태종 13) 익주는 현재의 명칭인 익산군으로 개칭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익산군의 호구는 319호 1,623인이었다. 또 『태종실록』에 실린 국가에 복이 있기를 기원하는 사찰인 자복사(資福寺) 88개소 가운데 미륵사가 언급되기도 한다. 조선 시대 익산은 여산, 용안, 함열, 익산 등 네 개의 고을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조운(漕運)의 거점지로 중시되어 웅포에 덕성창(德成倉), 성당포에 성당창(聖堂倉)이 있었으며, 남해에서 중앙으로 연결되는 함열의 소방봉봉수대(所方峰烽燧臺)와 용안의 광두원봉수대(廣頭院烽燧臺)가 있어 군사적으로도 중시되었다.
1895년 부(府)·목(牧)·군(郡)·현(縣)의 명칭을 군으로 통일하고 23부에 예속시키는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할 때, 익산 지역의 네 개 고을은 여산군, 함열군, 용안군, 익산군으로 이름이 바뀌어 전주부의 관할이 되었다. 1911년 금마에 있던 군 소재지가 이리로 옮겨지고, 1912년 호남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이리의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1914년에 네 개의 군이 통폐합되어 익산군이 되면서 비로소 한 고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