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2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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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道路 |
영어공식명칭 | Road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백현명 |
[정의]
전라북도 익산 지역에 있는 차가 다니는 큰길.
[개설]
전라북도 익산시는 호남고속도로가 동부를 지나고 국도1호선, 국도23호선 등 10여 개의 주요 국도와 주요 지방도로가 전국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1980년부터 금마에 고속도로 IC가 생기면서 전라도 내 3개의 시와 직결되어, 국도, 고속도로, 지방도로, 철도가 사통팔달로 연결된 호남 지방 최고의 교통도시라고 할 수 있게 되었다.
[익산 도로 개통의 시발점]
전라북도 익산은 군산, 전주, 삼례, 여산, 금마, 강경, 논산 등지와 연결되는 도로 교통의 중핵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익산의 교통 입지와 함께 많은 양의 양곡을 생산할 수 있는 배후지를 가진 조건 덕분에 익산은 근대 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컸다. 이러한 가능성을 현실로 만드는 것에 큰 역할을 한 것이 일본인들이었다. 대한제국 식민지화에 대한 모든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일합병 이전에 육지로 건너온 일본인들은 익산 지역이 가지고 있는 이점[전북평야의 중심, 교통의 요지]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 이유는 익산 지역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많은 재화를 축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1906년 일본인 전중부차랑(田中富次郞)이 군산에서 익산으로 이사를 한 것을 시점으로 1907년부터 일본부현에 대부호 대교여시(大橋與市)가 지길원신(枝吉元信) 등 사람들을 데리고 와 토지를 값싸게 매입하기 시작하였다. 1908년엔 선미조(扇米助)와 전중수일(田中數一) 등이 익산으로 이주하여 대농장을 운영하였다. 익산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의 영향으로 1908년 전주와 군산 간에 도로가 뚫리게 되었다. 한일합병 이후인 1911년 2월 15일 대교농장(大橋農場) 대표 지길원신과 전중부차랑, 선미조 등이 새로운 사업을 벌이면서, 고천천대길(古川千大吉), 전중수일(田中數一), 삼도무웅(森島武雄) 등의 협조와 거주자 34인의 찬성을 얻어 익산번영조합의 모체를 조직하였다. 익산번영조합은 15개조의 규약을 만들고, 조합장으로 지길원신, 부조합장으로 전중수일, 간사로 선미조, 평의원으로 전중부차랑, 고천천대길, 삼호제차(三好諸次)를 뽑아 매월 조합비를 걷었다. 조합비로 걷은 돈은 익산 지역의 시가를 계획하고, 도로를 건설하는 것에 사용되기도하고, 학교 조합을 만들고, 위생 경비 기관을 만드는 데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외곽에 위치한 관공서들을 익산으로 이전시키는 운동을 시행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일본인 지주들의 노력으로 익산이 큰 번영을 이룩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호남 최고의 교통도시의 명성을 만든 익산 도로의 모체가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도로 공사와 철도 부설의 근본적인 목적은 호남지방에서 생산되는 양곡의 약탈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이 한국의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는 일제 침략의 정당성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없다.
[새마을 사업과 인북선 개통]
1970년대 초 박정희 정부는 대한민국 농촌의 현대화를 위해 새마을운동[신향촌운동] 사업을 진행하였다.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농촌의 도로공사 및 확장 개편이 포함되었다.
새마을 사업이 전라북도 익산시 지역에도 적용되면서, 1972년 익산의 마을 안길 6,533m에 달하는 비포장도로의 도로포장 및 도로 확장 공사가 진행되었다. 새마을 사업의 확장으로 1975년 인북선 개통을 위한 도로공사가 시행되었다. 인북선은 2019년 현재 익산의 인북로로 불리는 도로로 익산공용버스터미널 인근의 인화사거리를 기준으로 하여 남북으로 뚫려 있는 직선도로를 가리킨다. 현재 인북로는 익산의 주요 행정기관, 교육기관, 기타 서비스 기관[이일여자중학교, 이일여자고등학교, 이리중앙초등학교, 연세병원, KT 익산지사, 익산시청 본청, 이리고등학교, 남중동우체국, 영등치안센터, 신동시장 등] 등 익산의 주요 기관들을 가로지르는 익산 주요 도로 중 하나이다. 인북선 개통은 기원전자 대표이사였던 강영식[인북선 개발위원장]을 필두로 최초로 계획된다. 1974년과 1975년 익산시는 ‘총화 개발하는 희망찬 새 이리 건설’ 사업을 추진하였고, 계획된 주요 사업 중 하나가 인북선 개통을 위한 도로공사였다. 익산의 행정, 교육, 기타주요 기관들이 인북선 개통으로 연결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익산시는 1975년 5월 인북선 도로공사를 진행하였고, 1977년에 인북선 준공이 완료되어 ‘인북선 개통식’을 열게 된다. 당시 인북선[인북 대간선]은 폭 25m, 길이 1,920m에 달하였는데, 이후 도로 확장 공사가 진행되면서 2,520m로 길이가 확장된다. 인북선이 개통되면서, 익산 시민들은 자율적으로 헌수 운동을 전개하고, 화단을 만들고, 가로수를 심는 등 익산시 도시환경 조성에 힘을 실었다. 인북선 개통의 결과로 익산 시민들이 보여 준 긍정적인 행보는 익산 시민들의 애향심을 느낄 수 있는 긍정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인북선 개통식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77년 11월 11일 이리역 화약열차 폭파 사고가 일어나게 되는데, 사고 수습을 위해 익산시가 ‘새이리 건설사업’을 시행되면서 인북선 재포장 공사가 시행된다. 이후 익산시의 발전과 함께 인북선이 확장되면서, 2019년 현재 인북선은 인북로로 개칭되고, 익산의 평화동, 중앙동, 남중동, 신동을 모두를 잇는 직선도로가 되어 길이 약 4.7㎞ 정도로 확장되었다. 2019년 현재 인북로는 익산 시내의 주요 도로로 익산 시민들과 방문객들의 교통편의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1977년 이리역 화약열차 폭파 사고 이후 익산시 도로공사]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15분, 당시 이리역[현 익산역] 구내에서 화약 폭발 사고가 일어나게 된다. 이리역폭발사고로 인하여 1,402명의 인명 피해[사망 58명, 중경상자 1,344명]와 이재민 6,326명[1,365세대]이 발생하였고, 46억여 원 상당의 재산 피해액[민간시설 2.350동에 19억 원 상당, 공공시설 1,189건에 27억여 원 상당]이 발생하였다. 이리역폭발사고로 익산 시민들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큰 슬픔에 빠지게 된다. 국가적으로 빠른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천막촌을 세워 이재민을 수용하는 한편,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대책으로 정부와 익산시는 1977년 11월 19일 ‘새이리 건설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후 익산시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온 국민의 뜨거운 성원에 힘입어 재해복구 작업과 함께 1978년 ‘새이리 건설사업’을 시행한다. ‘새이리 건설사업’에서 계획된 사업과제 중 하나가 익산 내 도로의 가로망 확대 사업이었다.
가로망 확대 사업이 시행되면서, 익산에 있는 총 9,492m 길이의 도로가 건설[확장] 및 포장된다. 이로 인해 익산 내 도로교통 시설의 비약적으로 확장 및 발전을 이루게 된다. 이때 건설된 주요도로로는 남북로[3,108m], 익산로[2,000m], 동서로[1,180m], 중앙로[544m], 인북선 포장[2,520m] 등과 함께 철도 육교[2개소], 철도변 조경[1개소] 등이 있다. 당시에 사업비로 약 33억 7600만 원이 투자되었으며, 익산에서 진행된 매우 큰 규모의 도로공사 중 하나였다.
이후 1979년 ‘새이리 건설사업’이 이어서 진행되면서, 동서로 600m, 중앙로 450m, 배산로 400m, 종합병원 진입로 600m 등 총 2,100m의 도로공사가 진행되었다. 1980년에는 ‘새이리 건설사업’이 ‘밝고 풍요로운 새이리 건설’로 사업명이 바뀌게 된다. 이리 진입로 1,700m에 달하는 도로의 노폭을 16m에서 35m로 확장하였고, 평화고가도의 교가 확장하는 공사, 익산시 신동에 위치한 원광대학교에서 황등에 이르는 요교 사이의 510m 도로 노폭을 12m로 확장하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이후 전두환 정권을 지나 노태우 정권[1988년 2월 25일~1993년 2월 24일] 기간 동안에는 익산시 도시기반시설의 확충 사업의 일환으로 도로망 확장 사업이 진행되었다. 이 기간 동안 모현아파트에서 송학국민학교 간 1.2㎞와 2.4㎞ 길이의 노선 8개 등이 새로 개설되었다.
이후 김대중 정권 동안 전라북도 익산시는 지방자치체 실시의 성과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그중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부터 진행되었던 익산시 내의 교통정리 사업이 이어서 속행된다. 이때 익산시 내에 122개의 도로가 신설되고 확장 및 포장되었다[이리에서 망성면까지의 관통 도로와 이리에서 미륵산까지의 직선 도로가 개설된다]. 당시 도로공사에 들어간 예산이 이례적으로 많았다.
이처럼 익산시 도로교통의 발전 과정에는 한국의 근대화와 현대화를 연결하는 사건들[한일합병, 새마을운동, 익산 77재해, 민주화운동 등]과 깊은 연관이 있다. 물론 이러한 사건들을 흑과 백의 논리로 분명히 구분하여 평가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로 인하여 익산이 전북 교통의 중심지로서 그 기능을 최대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음은 사실로 볼 수 있다.
[현황]
2019년을 기준으로 익산 지역의 도로는 총 1,557개, 길이는 총 1448.3㎞이다. 그중 포장도로는 1,244개이며, 길이는 925.8㎞이다. 비포장 도로는 313개로 길이는 522.3㎞이다. 익산 지역 안에 있는 고속도로는 1개로 길이는 17.3㎞이며, 국도는 5개로 총길이 81.8㎞이다. 나머지 도로는 지방도 12개[163.1㎞], 시도 1,264개[463.5㎞], 군도 23개[200.6㎞], 농어촌도 252개[522㎞]로 구성된다.
특히, 기존의 익산장수고속도로[제26호], 김천포항고속도로[제27호], 김천포항고속도로지선[제27의 2호]를 통합한 고속국도 익산포항고속도로[제20호선]의 개통은 호남 최고의 교통도시로 불리는 익산의 명성을 높이고 있다. 익산포항고속도로는 전라도와 경상도 간에 이동의 편의성을 줄 뿐만 아니라 호남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 중앙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 등 국가의 주요 고속도로와 연결되면서 전라북도의 낙후 지역인 진안과 완주 그리고 장수 지역에 물류 수송과 이동성을 제고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속국도 익산포항고속도로는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에서 장수분기점까지 61.6㎞, 경상북도 대구에서 경상북도 포항 연일읍까지 68.4㎞로 총 연장이 130㎞에 이르며, 너비는 23.4~30.6m인데, 익산에서 장수분기점, 팔공산에서 북영천, 서포항에서 포항 구간은 왕복 4차로, 북영천에서 서포항 구간은 왕복 6차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