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4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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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益山鄕校大成殿 |
영어공식명칭 | Iksan Hyanggyo Main Hall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고도7길 11-3[동고도리 389-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안선호 |
건립 시기/일시 | 1398년 - 익산향교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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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임진왜란 - 익산향교대성전 소실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629년 - 익산향교대성전 중건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5년 8월 16일 - 익산향교대성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5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익산향교대성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
현 소재지 | 익산향교대성전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고도7길 11-3[동고도리 389-1] |
성격 | 전각 |
양식 | 다포계 건축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2칸 반 |
관리자 | 익산향교전교 |
문화재 지정 번호 |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익산향교에 있는 조선 후기 전각.
[개설]
익산향교대성전(益山鄕校大成殿)은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익산향교에 있는 조선 시대 전각이다. 향교는 고을의 크기에 따라 대설위(大說位), 중설위(中設位), 소설위(小設位)로 나뉘었는데, 익산향교는 중설위 향교로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다섯 명의 성인(五聖)[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과 공자의 제자 10명, 송나라의 유학자 6명을 모시고 동무와 서무에는 우리나라의 유학자 18명의 위패를 모셨다.
일반적으로 경사지에 있는 향교는 대성전이 뒤쪽에 있고 명륜당이 앞쪽에 있는 소위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따르며 여러 건물들이 좌우대칭을 이룬다. 그러나 익산향교는 경사지에 있으면서도 대성전과 명륜당이 직선축을 이루지 않고 대성전의 남동쪽에 명륜당이 비켜 서 있다. 이러한 배치 구조는 충분한 외부 공간이 확보되지 못한 대지 여건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형 조건을 잘 이용하여 대성전이 명륜당보다 위계가 높음을 표현하고 있다. 익산향교대성전은 1985년 8월 16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5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위치]
익산향교대성전은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고도7길 11-4[동고도리 389-1]에 있다. 금마면사무소에서 고도길을 따라 여산 방향으로 700m 정도 가다 보면 왼쪽에 홍살문이 보이고 안쪽에 익산향교가 있다.
[변천]
익산향교는 1398년(태조 7)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때 모든 건물이 불에 타 소실되었으며 대성전은 1629년 중건하였다.
[형태]
익산향교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정면은 제례의 편의를 고려하여 툇간을 개방하고 매 칸마다 두 짝 판문을 달았다. 나머지 삼면은 창호 없이 벽체로만 구성하였다. 대성전 건물은 공포를 기둥 위에만 올리지 않고 기둥 사이에도 설치한 다포계 건물이다. 다른 지역 향교와 비교할 때 화려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본래 다포식 구조는 창방[기둥과 기둥 상부를 연결하는 부재] 위에 평방이라는 부재를 올리고 그 위에 공포를 놓는다. 그러나 이 건물은 평방 없이 창방 위에 공포를 직접 배열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공포의 세부 짜임과 모양을 보면 일반적인 다포계 공포가 아닌 익공계 공포에 가깝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사람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처마는 서까래와 부연을 사용한 겹처마이다.
[현황]
익산향교대성전은 동무, 서무, 내삼문과 함께 담장으로 구분되어 문묘 영역을 이룬다. 내삼문 밖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학 영역으로 명륜당, 동재, 서재가 있다. 이 외에도 제기고와 교직사가 있으며 앞마당에는 수령이 오래된 익산향교의 은행나무[전라북도 기념물 제113호]가 있다. 외삼문 밖에는 관리들의 공덕비(公德碑)와 선정비(善政碑) 등 14기의 비석군이 있는데 익산 관아 주변에 있던 것들을 옮겨온 것이다.
[의의와 평가]
익산향교대성전은 다른 지역 향교의 대성전과 비교할 때 다포식 건물로 희소성이 있다. 조선 후기 건축물의 특징을 잘 보여 주며 구조 기법이 특색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