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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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五岡書院 |
영어공식명칭 | Ohgangseowon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석암동 반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봉곤 |
건립 시기/일시 | 1852년 - 오강서원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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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884년 - 오강서원 이전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61년 - 오강서원 중건 |
현 소재지 | 오강서원 - 전라북도 익산시 석암동 반산 |
원소재지 | 오강서원 - 전라북도 익산시 오산면 오산리 |
성격 | 서원 |
양식 |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2칸 |
소유자 | 익산 김녕김씨 종친회 |
관리자 | 익산 김녕김씨 종친회 |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석암동에 있는 김녕김씨 문중 서원.
[개설]
오강서원(五岡書院)은 전라북도 익산시 석암동에 있는 김녕김씨 문중 서원이다. 시조 김시흥(金時興)을 주벽으로 김향(金珦)과 김관(金觀), 김문기(金文起), 김준(金遵)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제사는 음력 3월 5일에 지방 유림들과 후손들이 모여 지내고 있다.
김시흥은 본관은 김녕이고 고려 인종 때 광록대부(光錄大夫)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1135년(인종 13) 묘청의 난을 진압하여 ‘김녕군(金寧君)’의 작위와 포상을 받았다. 1174년(명종 4)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하여 ‘상락군(上洛君)’의 작위를 받게 되었다. 김시흥이 죽은 뒤 문열공(文烈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김향(金珦)은 본관은 김녕이고, 척준경(拓俊京)과 함께 이자겸의 일당을 제거하였다. 위사공신으로 벼슬은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원정(元靖)이다.
김관의 호는 수헌(睡軒)이고, 본관은 김녕이며 이조판서를 지냈다. 아들이 김문기이다.
김문기는 본관은 김녕이고, 호는 백촌(白村)이다. 1426년(세종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계유정난이 일어나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내쫒고 왕위에 오르자,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하였으나 발각되어 고문 끝에 죽었다. 영조 때에 이르러 김문기의 9세손 김정구(金鼎九)의 상소로 복권되었고,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오늘날에는 김문기의 후손들에 의하여 서울에 있는 사육신(死六臣)의 묘역에 가묘가 설치되었으며,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김천의 의절사(義節祠), 영월 장릉의 충신단(忠臣壇) 등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김준의 호는 만지당(晩池當)이고, 본관 김녕이다. 김준은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은둔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위치]
오강서원은 전라북도 익산시 석암동 반산에 있다.
[변천]
오강서원은 1852년(철종 3) 전라북도 익산시 오산면 오산리에 세워졌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884년(고종 21) 전라북도 익산시 석암동로 장소를 옮겨 ‘반산단(盤山壇)’으로 개칭하고 향사를 지냈다. 1961년 김문기의 후손인 김대규(金大奎)와 김형종이 사당과 강당을 세우고 ‘오강서원’으로 개칭하였다.
[형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과 4칸의 강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황]
오강서원은 현재 사당을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잡초가 무성하다.
[의의와 평가]
오강서원은 고려 중기의 무신 김시흥을 비롯한 김녕김씨 4명의 위패를 모신 지방 서원으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