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6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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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行儉 |
영어공식명칭 | Lee Haenggeom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류호석 |
[정의]
고려 후기 익산 출신의 문신.
[가계]
이행검(李行儉)[1225~1310]의 본관은 익산(益山)이고, 아버지는 한림학사승지 이주(李湊)이다. 아들은 성균관대사성 이직(李稷)과 감찰규정 이애(李崖)이다. 딸은 기자오(奇子敖)에게 시집가서 원나라 순제(順帝)의 황후인 기황후를 낳은 영안왕부인(榮安王夫人)이다. 정당문학을 지내고 익산부원군으로 책봉된 이공수(李公遂)가 손자이다.
『고려사(高麗史)』 「열전」에는 이주·이행검 부자를 금마군인(金馬郡人)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본관이 금마군이라는 의미인데, 나중에 금마군이 익주, 그리고 익산으로 바뀌면서 금마이씨는 익산이씨가 되었다.
[활동 사항]
이행검은 1225년(고종 12) 익산에서 태어났다. 1250년(고종 37)에 예부시에 급제하여 진주사록, 상서도사 겸 직사관 등을 지내고 지홍주사가 되었을 때 홍주가 삼별초(三別抄)에게 함락되자 억지로 삼별초에 가담하게 되었다. 추토사(追討使) 김방경(金方慶)이 삼별초를 토벌하면서 이행검을 체포하였으나 이행검이 김방경의 아버지인 김효인(金孝仁)의 제자였기 때문에 죽음을 면하였다. 이후 이행검은 청주목사, 지곡주군사, 풍주부사를 역임하였다.
충렬왕 때 사간으로 있던 이행검은 정랑 임정기(林貞杞)와 봉의랑 고밀(高密)의 임명장에 동의하는 서명을 거부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 섬으로 귀양갔다가 이존비(李尊庇)의 주선으로 풀려났다. 그 뒤 전법사좌랑으로 있을 때에는 충렬왕의 비인 정화원비(貞和院妃)가 종으로 삼으려던 양민이 전법사에 소송을 제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행검은 왕명을 어기면서까지 정화원비의 행위가 부당함을 지적하는 간언(諫言)을 왕에게 올렸다.
이행검은 벼슬이 보문각직학사를 거쳐 언부전서에 이른 뒤 사직하였으며, 1310년(충선왕 2) 사망하였다.
[묘소]
이행검의 묘소는 개성직할시 개풍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