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6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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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蘇永福 |
영어공식명칭 | So Youngbok |
이칭/별칭 | 수중(綏重),사은(四隱),반구당(返求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류호석 |
출생 시기/일시 | 1555년 - 소영복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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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82년 - 소영복 진사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소영복 성균관에서 나와 익산으로 낙향 |
활동 시기/일시 | 1601년 - 소영복 희릉참봉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615년 - 소영복 사망 |
출생지 | 익산 - 전라북도 익산시 |
거주|이주지 | 익산 - 전라북도 익산시 |
묘소|단소 | 무수골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
사당|배향지 | 화암서원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진주(晉州) |
대표 관직|경력 | 희릉참봉 |
[정의]
조선 후기 익산 출신의 학자.
[가계]
소영복(蘇永福)[1555~1615]의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수중(綏重), 호는 사은(四隱) 또는 반구당(返求堂)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의빈도사를 지낸 소자파(蘇自坡)이고, 할아버지는 남원부사 소세량(蘇世良)이다. 아버지는 감찰 소민선(蘇敏善)이며, 어머니는 현령 신언숙(申彦淑)의 딸 평산신씨(平山申氏)이다. 큰삼촌인 한성서윤 소응선(蘇膺善)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양어머니는 군수 윤표(尹彪)의 딸 해평윤씨(海平尹氏)이다.
[활동 사항]
소영복은 1555년(명종 10) 익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김은휘(金殷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1582년(선조 10)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소영복의 재주를 알아보고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권유하였으나, 학업이 아직 미진하다면서 사양하였다. 성균관에서도 당쟁의 바람이 거세게 일어나자 1592년에 소영복은 익산으로 낙향하였고,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용화산(龍華山)에 울타리를 치고 군량을 모으며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소영복은 10여 조에 이르는 시무책(時務策)을 조정에 올렸으며, 선조가 이를 받아들여 관련 기관에 시행하도록 조치하기도 하였다.
소영복은 1601년(선조 34)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였다. 1602년 연이어 부모의 상을 당한 뒤로는 산속 거처에서 독서에 전념하며 정경세(鄭經世)·한백겸(韓百謙)·조헌(趙憲)·김상헌(金尙憲)·이춘영(李春英)·신응구(申應榘)·윤형(尹泂)·황신(黃愼)·박동열(朴東說)·이의건(李義健)·이기설(李基卨)·송영구(宋英耇) 등 당대의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소영복은 수천 권의 서책을 소장하고 있었던 다독가이자 천문, 지리, 의복(醫卜), 병법 등 다방면에 박학다식하였다. 경전과 사서 등 소장하고 있던 책들을 나라에 기증하여 궁중의 비서각(祕書閣)에 비치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1615년(광해군 7)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소영복의 저서로는 후손인 소자명(蘇子鳴)이 편집하여 간행한 2권 1책의 『사은유고(四隱遺稿)』가 전한다. 현재 전북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소]
소영복의 묘소는 『함열남궁씨세보(咸悅南宮氏世譜)』에 무수동(无愁洞) 선영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수동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무수골이다.
[상훈과 추모]
소영복은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배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