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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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堤川-義林池 |
영어의미역 | The Mirror of Jecheon's Clear Blue Sky, Uirimji Reservoir |
분야 | 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모산동 241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려/고려,조선/조선,현대/현대 |
집필자 | 양기석 |
[개설]
의림지는 김제 벽골제와 밀양 수산제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로서, 우리나라 수리 역사 연구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농경 관련 유적이다. 충청도를 호수의 서쪽이라 하여 호서 지방(湖西地方)이라고도 불렀는데, 바로 이 의림지가 기준이 되었다.
충청북도 제천시의 시가지 북쪽 4㎞ 부근 청풍문화재단지를 빠져나와 시내를 관통한 뒤 용두산 끝자락으로 달려가면 용두산[높이 874m] 남쪽 기슭 아래쪽에 자리 잡고 있는 저수지가 바로 의림지다. 원래는 ‘임지(林池)’로 불리던 곳으로, 고려 성종 때 군현의 명칭을 바꿀 때 제천을 ‘의원현(義原縣)’ 또는 ‘의천(義川)’이라 했는데, 제천의 옛 이름인 ‘의(義)’ 자에다 ‘임지’를 붙여 ‘의림지’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의림지가 언제 축조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삼한 시대에 축조되었다는 설도 있고, 신라 진흥왕 때 악성 우륵이 개울물을 막아 둑을 쌓았다고 전한다. 그로부터 700년 뒤 이곳에 온 현감 박의림(朴義林)이 쌓았다는 설도 있으나, 제천이 고구려 때 이름이 ‘내토군(奈吐郡)’인 것으로 보아 삼국 시대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림지는 호반 둘레가 약 1.8㎞, 면적은 15만 8,677㎡, 저수량 661만 1891㎡, 수심은 8~13m의 대수원지다. 2000년 제천시가 작성한 의림지구 작부 실태 현황에 의하면 몽리 면적은 195만 5897㎡인데, 그 중 논이 172만 5437㎡이고, 나머지 23만 490㎡는 밭에 해당한다. 그 대상 지역은 제천시 모산동 336호, 제천시 신월동 267호, 제천시 청전동 415호, 그리고 제천시 송학면 도화동 7호 등 모두 1026호에 해당한다. 이 자료를 통해 보면 현재까지도 의림지가 제천 지역의 중요한 농업 생산 기반으로 기능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의림지는 제천 지역의 대표적인 명승지로서 북으로는 용두산이 내려다보이고, 호수 둑에는 노송과 수양버들, 30m의 자연 폭포 등이 어우러져 멋진 경관을 이루고 있다. 또한 1807년(순조 7)에 세워진 영호정(暎湖亭)과 1948년에 건립된 경호루(鏡湖樓)는 관광객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다. 의림지는 1976년 12월 21일 충청북도 지방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된 후 관리되고 있다. 또한 2006년 12월에는 문화재청이 고대 수리 시설인 의림지와 그 주변의 정자 및 소나무가 어우러진 의림지 주변 지역을 명승 제20호로 지정할 정도로 의림지는 제천 지역의 대표적인 명승지이자 상징물이다.
[의림지는 왜 축조되었을까?]
의림지는 제천시 북쪽 용두산 남사면과 직치[일명 피재]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지점에 제방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고, 그 물을 제방에 시설되어 있는 수문을 통해 제천분지에 있는 논에 관개를 하는 역할을 한다. 의림지는 그 하류의 곡지 중앙과 충적선상지에 대한 관개용 용수 조달의 필요성에 따라 상류부 곡지 하천의 자연 입지 환경을 최대한 이용하여 축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면에서 의림지는 산골짜기에서 흘러 들어오는 계곡물과 샘에서 분출하는 용수(湧水)를 활용한 산곡형(山谷型) 저수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제방은 자연의 경사면을 이용하기 때문에 수심이 깊고 면적 또한 넓어 풍부한 수량을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의림지에 대해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제방은 낮은 산줄기 사이를 흐르는 작은 계곡을 막은 곳에 자리하는데, 그 길이는 530척이며, 관개 면적은 400결이나 된다.”고 하였으며, 조선 후기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못의 둘레는 5,870척이나 되고 수심은 너무 깊어서 잴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의림지는 규모가 크고 수심이 깊은 산곡형의 제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의림지는 무엇보다 제천 지역의 최대 평야 지대인 제천분지를 관개하는 농경용 수리 시설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가뭄과 홍수로부터 안전하게 전답을 보호해 줄 뿐 아니라 주변의 수전 개발을 촉진하며, 궁극적으로 농업 생산량을 높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계류를 저수하여 홍수 때 수위를 조절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이는 1972년 8월 18일과 19일에 걸쳐 내린 집중 호우로 의림지가 파괴된 사례로 미루어 볼 수 있다. 제천 지역은 대부분의 지역이 해발 300m 이상의 고원 분지로 되어 있고, 제천천 유역을 제외하고는 뚜렷한 평야가 발달하지 못한 곳이다. 강수량은 연 1358.3㎜로서, 우리나라 평균치인 1,100㎜보다 많은 집중 다우 지역 현상을 보이고 있어 수해를 자주 입는 지역이다. 경지 면적도 2003년에 논은 3만 4910㎡인데 비해 밭은 8만 1670㎡로 밭이 논보다 거의 2배 이상 많다. 의림지가 평지형 제언이 아닌 산곡형 제언이라는 점에서도 더욱 그렇다.
[의림지는 언제 만들어졌을까?]
의림지를 언제 처음 쌓았으며, 또한 언제 고쳐 쌓았는지에 대해서는 관련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조선 왕조의 공식 기록인 『성종실록(成宗實錄)』이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을 비롯하여 각종 지리지나 읍지 등에서 의림지에 관한 아주 단편적인 기사만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의림지가 언제 처음 축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대략 세 가지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첫째는 삼한 시대 축조설로서, 김제의 벽골제 등과 같이 삼한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는 입장인데,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견해이다. 둘째로 6세기 중반인 신라 진흥왕 대의 악성 우륵(于勒) 축조설이 있다. 이는 의림지에 우륵과 관련한 전설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을 기초로 하고 있다. 셋째는 조선 시대에 정인지(鄭麟趾) 등과 같은 인물이 축조했다는 견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삼한 시대 축조설을 처음으로 제기한 사람은 이병도였다. 그러나 어떤 정밀한 학술 조사를 통해 제기한 것이 아니라 단지 관련 지명의 언어학적 해석에 근거하여 추론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를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있다. 고대의 제방 축조 공사는 대규모의 인력 동원과 고도로 발달된 측량술 및 대형 석재의 운반과 구축 기술을 필요로 한다. 이 때문에 막대한 노동력을 부릴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국가 기반이 확립되어 있어야 가능한 사업이다. 벽골제의 경우 높이 4.3m, 상변 폭 7.5m, 하변 폭 17.5m의 제방을 축조하기 위해 연인원 32만 2500명이라는 방대한 인원을 동원했다고 한다. 따라서 삼한 시대의 소국이 과연 이러한 대규모 제방을 축조할 수 있는 사회 발전 수준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신라 진흥왕 때[540~576] 악성 우륵 축조설은 조선 후기에 구비 전승을 채록한 관련 문헌 자료와 청풍 및 제천 의림지 주변에 남아 있는 우륵과 관련한 전설 및 관련 유적들에 기초해서 나온 것이다. 현재 제천 의림지 주변에는 우륵이 살았다는 의림지 동쪽 돌봉재[石峰]와 우륵당(于勒堂)의 옛터, 그리고 그 동북쪽에 우륵이 식수로 사용했다는 우륵정(于勒井) 등이 전한다. 또한 의림지 동북쪽에 있는 제비바위[연자암(燕子巖), 용암(龍巖)]는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 전한다.
숙종 때 오상렴(吳尙濂)[1680~1707]이 쓴 『연초재문집(燕超齋文集)』과 헌종 때 편찬한 『충청도읍지』[권7, 제천현], 박수검(朴守儉)[1629~1694]의 문집인 『임호집(林湖集)』, 김이만(金履萬)[1724~1776]의 기문(記文), 최석정(崔錫鼎)[1646~1715]의 문집 등에서 이러한 우륵 관련 전승이 보인다.
그러나 우륵은 가야에서 신라로 망명한 이후 금성[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국원소경(國原小京)[충주]에까지 온 사람으로서 의림지 같은 큰 제언을 만들 만한 위치에 있었다고는 결코 생각되지 않는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진흥왕 12년과 13년조 기사 및 악지 등에 나오는 우륵 관련 기사를 분석해 보면, 악사 성열현(省熱縣) 사람인 우륵이 대가야에서 신라로 망명하여 안치된 곳은 지금의 충주 지역인 국원소경임이 밝혀진 상태이다. 또한 현재 충주시 탄금대 일대에 우륵과 관련한 전승이나 유적이 존재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청풍이나 의림지 거주설을 전승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다만 우륵은 의림지를 축조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원래 국원소경에 거주하다가 풍광이 수려한 의림지 주변에서 만년을 보냈을 가능성도 있고, 아니면 그가 거주하던 국원소경에서 벗어나 산수가 수려한 남한강 주변인 청풍과 제천 의림지 일대를 넘나들면서 그의 예술적 재능을 힘껏 발휘한 데서 이러한 설화가 만들어져서 전해진 것이 아닐까 한다.
다음 조선 전기에 의림지를 쌓았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는 두 가지가 전해 오는데, 하나는 세종 때[1418~1450] 현감 박의림(朴義林)이 쌓았다는 설과, 또 하나는 정인지(鄭麟趾)가 쌓았다는 설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제언에는 축조자의 이름을 붙인 경우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나,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의림지는 전 왕조에서 쌓은 것”이라고 한 것을 보면, 이처럼 조선 전기에 처음 축조하였다는 기록은 거의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정인지는 세조 초년 충청도 관찰사로 재임할 당시 단종 복위를 꾀하던 금성대군과 순흥 부사 이보흠(李甫欽)을 저지하기 위해 제천에 머물면서 충청도와 영남·관동의 병사를 모아 의림지를 축조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정인지 축조설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나 다른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 대신 조선 후기 김이만의 「의림지기문(義林池記文)」과 한진호(韓鎭戶)의 『도담행정기(島潭行程記)』에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이 설 역시 우륵 축조설과 함께 조선 후기 이 지역의 사대부들에 의해 채록된 것이 아닐까 한다. 이것은 의림지를 조선 전기에 와서 새로 축조했다고 보기보다는 이때 보수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상과 같이 의림지가 언제 축조되었는지에 관한 견해들은 어떤 객관적인 근거를 통해서 입론된 것이 아니라, 거의 다 이 지역에서 전해 오는 구비 전승에 의존하고 있어 정설화하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의림지가 언제 축조된 것인지 문헌학적인 입장과 지질학적인 입장에서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추정해 보자. 우선 의림지는 제천 지역이 고구려의 영유기일 때 어떤 형태로든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고구려 영유기에 제천의 이름이 내토군(奈吐郡)이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삼국 시대 의림지의 원형이 될 수 있는 형태의 저수지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제천 지역과 관련이 있는 ‘토(吐)’·‘제(堤)’·‘제(隄)’ 등은 모두 저수지의 제방, 즉 ‘둑’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 때 박제상(朴堤上)의 별칭인 ‘모말(毛末)’과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는 모두 ‘제상(堤上)’과 같은 말로 ‘둑’을 의미한다. 박제상이 양산 지역을 중심으로 하나의 해상 세력을 구축했던 지방 세력가였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고대 사회에서 물을 관리하거나 또는 해상을 지배하는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 주는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의림지에서 연원한 제천의 경우처럼 고대의 행정 구역 명칭에서 저수지가 그 지역을 대표하는 명칭으로 사용된 사례가 종종 찾아진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고구려계 지명 중에는 내토군(奈吐郡)[제천], 주부토군(主夫吐郡)[부평], 속토현(束吐縣)[속초], 토상현(吐上縣)[통천] 등이 있는데, 이들은 통일 신라 경덕왕 때 이름을 각각 내제군(奈隄郡), 장제군(長堤郡), 속제현(梀隄縣), 제상현(隄上縣)으로 개명하였다. 따라서 ‘토(吐)’는 제방[堤=隄]을 뜻하는 고구려 계통의 말임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제천의 옛 이름인 ‘내토(奈吐)’는 시내[川]를 의미하는 말인 ‘내(奈)’에 방죽이나 제방의 뜻을 갖는 ‘토(吐)’의 결합어인 셈이다. 이와 같이 제천의 옛 이름인 ‘奈吐’가 의림지 때문에 생긴 것임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내토군의 별칭을 ‘대제(大堤)’라 하였으니, 큰 제방이 있는 고을, 즉 의림지를 염두에 두고 붙인 이름일 것이다. 백제 때의 제언인 벽골제가 있었던 김제의 옛 이름이 벽골군(碧骨郡)이었던 것을 상기하면, 당시 저수지가 갖는 의미는 대단히 컸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벽골군이 신라 때 ‘김제(金堤)’로 바뀐 것이나 고구려의 내토군이 ‘내제(奈堤)’나 ‘대제(大堤)’로 바뀐 것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아무튼 문헌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고구려에 의해 제천 지역이 경영되던 시기에 이미 현 의림지와 관련지어 볼 수 있는 저수지가 어떤 형태로든 분명히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으로 보건데 의림지는 최소한 5세기 후반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의림지 축조 시기와 관련하여 최근에 실시한 지질학적 연구 결과가 주목된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제천시의 의뢰를 받아 1999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의림지의 바닥에 있는 유기질 점토층에 대한 지질 조사를 실시하여 축조 연도를 보다 객관화하려는 학술 조사를 실시하였다. 충북대학교 박물관의 경우 1999년 8월 제천시의 요청에 따라 의림지에 대한 역사성을 밝히기 위한 정밀 지표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이 조사에 참여한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의림지 축조 시기 문제와 관련하여 의림지 바닥의 표층 퇴적물 시추공 시료의 최하부 지층의 연대를 추산한 결과, 보정 연대 1034~1223년 전으로 추정하였다. 발굴 깊이가 3m 60㎝에 불과하고 이 축조 연대도 하한선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삼한 시대 축조설을 입증해 주는 증거는 아니었다.
이어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2009년 6월에 실시한 두 번째 시추 조사 결과, 퇴적물 시료를 분석한 자료에 의거하여 의림지 제방의 축조 연대를 1900~2000년 전인 AD 100년 전후라는 연대 측정값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식물 파편을 분석한 자료에 의거하여 1200~1100년 전인 AD 800~900년 정도에 축조된 것으로 각각 추정하였다. 이번 조사에서는 제방 축조에 사용된 의림지 바닥 퇴적물보다는 식물 파편 연대를 의림지 제방의 안정적인 축조 연대로 보고 지난 2000년 조사와 같이 통일 신라 시대에 해당하는 AD 800~900년경에 의림지 제언이 축조된 것으로 보았다. 다만 바닥 퇴적물의 분석을 토대로 하여 AD 100년경으로 축조 연대를 소급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이처럼 의림지의 축조 시기에 대해서는 아직 확정할 수 있는 적극적인 근거는 찾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5세기 후반 이전 고구려 영유기에 제천의 이름이 의림지에서 비롯될 정도로 뚜렷이 존재하였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지질 조사뿐 아니라 제방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등도 병행하여 의림지의 축조 연대를 보다 객관화할 수 있는 연구가 계속 진전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의림지는 언제 정비되었을까?]
의림지는 규모가 크고 수심이 깊은 산곡형의 제언이기 때문에 일정한 수압을 견디기 위해 제방을 견고하게 축조해야 했다. 따라서 많은 노동력이 소요되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산골짜기로부터 경사면을 타고 많은 모래가 쌓이기 때문에 항상적으로 준설해야 하는 관리상의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의림지가 처음 축조되었을 당시의 제언은 제천천 주변에 사는 지역 주민들에 의해 소규모로 원형이 될 수 있는 형태의 저수지였을 것이다. 의림지가 삼국의 중심 지역에서 너무 떨어진 변경 지역에 있고, 또한 지세가 궁벽한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대규모 노동력이 동원되어 축조한 김제 벽골제처럼 중앙의 지배 세력이 제언 축조에 직접 관련되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삼국 시대에 처음 축조된 의림지가 수축된 것은 통일 신라 시대인 800~900년대로 보인다. 이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 2000년과 2009년 의림지 밑바닥 식물 파편 층에 대한 편년 분석에서 안정적 연대로 제시한 AD 800~900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8세기 말기인 원성왕 대[785~798]에서 헌덕왕 대[809~826]까지 수해와 한재 등 자연 재해에 관한 기록을 조사해 보면 이 시기에 의림지 수축에 관한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 신라에서는 기근과 한재, 그리고 지진 피해가 가장 큰 자연 재해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에 따라 신라에서는 그 대책의 하나로 관개 수리 시설에 대한 축조와 보수를 강구하게 되었다. 원성왕 6년인 790년 정월에 김제의 벽골제를 크게 증축한 바 있고, 이어 영천 청제가 536년(법흥왕 23) 처음 축조된 이후 798년(원성왕 14) 4월에는 규모를 확대시켜 수리한 사실이 ‘정원명 청제비’에 잘 나타나 있다. 810년(헌덕왕 2)에는 제방을 수리케 한 사례가 있다. 이때 의림지도 이러한 배경 하에서 정비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의림지는 통일 신라 시대에 수축한 이래 고려 시대에도 제언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고려 시대에는 제방을 높게 수축하는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토대로 조선 시대에 제방을 복구하는 수축 작업이 때때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본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세종 때 박의림이나 세조 때 정인지가 제방을 쌓았다는 전설과 1474년(성종 5) 홍윤성(洪允成)의 건의로 수축되었다는 사례가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이르면 의림지는 연안의 남대지(南大池), 상주 함창의 공검지와 함께 조선의 3대 저수지로 일컫을 정도의 높은 위상을 갖게 된다.
일제 강점기 일제는 농업 생산력을 증가시키기 위해 저수지 수축을 추진하였다. 이때 저수지와 보를 관리하는 규정에 수리 조합이 조직되었는데, 1914년 충청북도 지역에서는 제천의 의림지수리조합이 가장 먼저 결성되었다. 그리고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의림지수리조합에서는 의림지에 대한 대대적인 수축 공사를 벌였다. 관개용 수문을 개축하고 통관, 개폐 장치, 간선 수로, 인입암구(引入暗溝), 월수구(越水口)[물이 넘쳐흘러 나가는 수문] 등을 수축한 것이다. 그 결과 2.7㎢의 몽리 면적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고, 쌀 생산량은 1400석에서 2170석으로 155% 정도 대폭 늘어났다.
해방 후인 1972년 8월 18일과 19일에 걸쳐 홍수가 발생하면서 의림지의 제방 구조의 일면을 알게 되었다. 즉, 8월 19일에 462㎜나 되는 집중 호우가 쏟아지면서 의림지에 물이 차게 되자, 제방이 넘칠 것을 우려한 제방 아래 주민들이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판단되는 용폭 하류 인접지를 인위적으로 파괴하면서 의림지 제방의 구조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제방을 쌓기 전에 바닥을 깊이 파서 진흙을 넣고 통나무[직경 30~50㎝]들을 가로 세로로 묶어 가면서 버팀목을 만들고, 바깥 벽면은 수압을 받지 않는 면이므로 굵은 자갈돌들을 섞은 흙을 성토하여 축조하였지만 특수 공법은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물에 닿는 안쪽 면은 제방을 축조할 때 가장 중요한 구조물인데, 토사 정지각(Rosting Angle Soil)을 살려 토양의 붕괴를 막고 토질 역학적으로 제방을 오래도록 버틸 수 있도록 진흙과 모래, 소나무 낙엽을 층층이 번갈아 다진 후 다시 굵은 자갈이 섞인 모래흙으로 두껍게 덮었다. 이는 진흙층 사이에 끼인 낙엽 층에 공기가 통하지 않아 완전히 부식되지 않은 채 진흙과 더불어 물의 충격을 견딜 탄성과 복원력을 지니게 되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제방을 점토와 낙엽으로만 견고하고 탄력성 있게 축조하였다는 점이다.
의림지의 경우 제방 안쪽 면의 경우 제방 내심벽 위에 점토를 이겨 고르게 바른 다음 20~30㎝ 두께의 점토층을 이루어 놓았음이 확인되었다. 이 점토층을 불에 태워서 굳힌 다음 다시 진흙과 모래를 20㎝ 두께로 깔고 침엽수 낙엽층을 30㎝ 정도 골고루 덮고 다시 점토를 이겨서 두들겨 붙이고 불에 태워 굳힌 다음 진흙과 모래를 20㎝ 내외로 덮었다. 이러한 방법을 두 차례 반복한 다음 가장 바깥쪽인 제반 안쪽 표면에는 굵은 자갈이 섞인 일반 모래흙을 60~100㎝ 정도의 두께로 덮어 놓았다. 이렇게 하여 형성된 제방 안쪽 벽의 두께가 250~300㎝에 이른다.
이처럼 의림지의 제방은 연약한 지반을 보강하기 위해 점토와 나뭇잎 · 풀 등 본초류 또는 말목을 번갈아 여러 층위 이상 쌓아 올리는 공법인 부엽공법(敷葉工法)을 원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공법은 중국 전국 시대 초나라에서 만든 안휘성(安徽省) 수현(壽縣) 안풍당(安豊塘) 유적에서 활용된 이래 우리나라에서도 성이나 제언을 수축할 때 널리 이용되던 공법이다. 서울 풍납토성이나 김제 벽골제 축조에도 부엽공법이 원용되었음이 확인된 바 있다. 1972년 당시 의림지는 만수 면적이 115만 3000㎡이고, 유역 면적 750만㎡, 최고 수심 13.5m, 몽리 면적이 270만㎡였다.
[의림지의 경제적 가치는 얼마나 될까?]
의림지는 척박한 제천 지역의 경작지에 물길을 끌어들여 벼농사를 지어 보겠다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축조되었다. 그 결과 제천 지역은 주변 지역보다 훨씬 선진적인 농업 기반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제천 지역은 경작지가 559결 정도였는데, 그 중 400결을 의림지에서 관개했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제천현의 관개율이 무려 71.6%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충청도 12개 군현의 평균 관개율이 9.1%이고, 경상도의 평균 관개율이 28결 3부인 점을 감안해 보면 의림지의 효율성이 대단히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척박한 제천 지역에 젖줄을 대는 생명줄로서 의림지의 경제적 가치는 대단히 높다고 할 수 있다. 의림지는 이러한 높은 경제적 비중 때문에 조선 전기에는 몇 차례에 걸친 수축과 정비 작업을 수행할 정도로 지속적인 관리 대책을 마련해 온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의림지는 연안의 남대지, 상주 함창의 공검지와 함께 조선의 3대 저수지의 하나로 위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의림지와 함께 오래된 저수지로 알려진 김제의 벽골제와 밀양의 수산제는 저수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 되었지만 의림지만큼은 여전히 현재까지 중요한 관개 수리 시설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점에서 의림지가 농업 경제상에 차지하는 위상과 경제적 가치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충청도의 총 경지 면적 중 수전은 9만 4733결로서 조선 전기에 비해 거의 같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 중 제천 지역의 수전은 661결 87부 3속이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제천현에는 모두 9개의 저수지가 있는데, 의림지는 수심을 알 수 없다고 적혀 있다. 제천 지역은 충주 지역과 비교해 볼 때 경작지는 6.8배나 적었지만 충주와 대등할 정도의 저수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 의림지가 제천 지역의 안정적 농업 생산 기반을 갖추는 데 얼마나 중요한 구실을 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의림지는 조선 전기부터 개항기에 이르기까지 그 수리 기능이 잘 활용되어 왔으며, 특히 개항기에는 제천 지역 전체의 55.5%를 넘는 기능을 감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시인·묵객의 문화 공간으로 기능하다]
의림지는 산곡형 저수지로서 매우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제천의 진산인 용두산을 배경으로 주변에는 천연의 폭포와 바위, 절벽이 있다. 저수지 주변에는 노송과 수양버들과 같은 수목이 자라고 있어 물과 어우러지면서 수려한 경관을 이루고 있다. 의림지 서남쪽 소나무가 울창한 곳에는 대송정 터와 6칸 2층의 경호루가 있고, 그 위에는 용추폭포에서 넘친 물이 붉게 흐른다는 홍류동을 거쳐 하소천으로 흘러간다.
의림지 남쪽 한 가운데에는 순조 때 이집경(李集慶)이 세운 영호정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남동쪽에는 우륵과 관련한 우륵당, 우륵정이 의림지 축조의 비밀을 간직한 채 자취를 남기고 있다. 의림지 동북쪽에는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으로 알려진 연자암이 있으며, 의림지 북쪽 한가운데에는 순주라는 작은 섬이 있는데, 이 지역 특산물인 순채라는 식물이 무성히 자라던 곳이다. 또한 의림지 주변에는 들짐승과 날짐승이 깃드는 생명이 넘치는 공간이다.
따라서 의림지에는 일찍부터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찾아와 자연의 정취에 흠뻑 젖어 그 아름다운 풍광을 찬미하는 노래와 화폭에 담으려 하였다. 17~18세기 문인들인 박수검(朴守儉)·김봉지(金鳳至)·오상렴(吳尙濂)·김이만(金履萬)·최석정(崔錫鼎) 등이 이러한 부류에 속한다. 특히 오상렴과 김봉지는 「모산별업16경」이라 하여 의림지 부근의 의림지·대제·진섭헌·우륵당·연자암·대송정·호월정·선지·용담·홍류동·자연대·버들만·순주·내교·외교 등 16곳의 명승을 꼽은 적이 있다. 19세기에 활동한 이 지역 문객 정운호(鄭雲灝)는 의림지의 빼어난 풍광에 빠져 이렇게 한 수 읊었다.
「의림지 낚시하는 늙은이」
의림지 뛰어난 경치 제천을 떨치게 했는데/ 낚시하는 늙은이 맑고 한가로워 세상 밖에서 노니네/ 비바람에도 돌아가지 않는 뜻 화락한 풍취/ 산하와도 바꿀 수 없는 자릉(子陵)의 부류로세/ 봄이 오매 이 내 몸 바위 위에 제비와 짝하고/ 늙어 가매 이내 맘 물가의 배와 함께하네/ 우륵대는 비었어도 용폭은 남았으니/ 한 길의 연기 핀 경치 한 낚싯대로 가두네
이처럼 의림지의 아름다운 정취는 시인·묵객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가들도 의림지를 찾아 화폭에 그 정취를 담아냈다. 조선 후기에 의림지의 모습을 전하는 대표적인 그림 세 점은 이방운(李肪運)[1761~?]이 그린 「의림지도」와 권신웅(權信雄)[1728~1786]이 그린 「의림지」, 그리고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인 「의림지 폭포도」이다. 그 중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그림은 현재 용추폭포로 불리는 폭포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이방운과 권신웅의 의림지 그림은 오히려 18세기 의림지의 모습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데, 두 그림 모두 정선의 진경산수화에 영향을 받아 그렸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이방운의 그림은 제방이 장방형으로 잘 정비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데, 제방 주위에 영호정과 함께 지금처럼 소나무를 비롯한 많은 수목이 식재되어 있어 풍광이 매우 수려한 정경을 나타내 주고 있다. 반면 권신웅의 그림은 간략한 스케치 풍으로 묘사되어 의림지의 세밀한 정경이 대폭 약화되어 있는 느낌을 주고 있다.
이처럼 의림지는 조선 후기에 그 주변에 빼어난 경관과 함께 대송정, 영호정, 호월정,·임소정,·후선각 등 여러 누정을 중심으로 시인·묵객과 화공들에 의해 격조 높은 문화 공간으로 자리하던 곳이었다. 이런 면에서 의림지는 농업 생산의 높은 경제적 가치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격조 있는 문화 공간으로서 가치를 가진 곳으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