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5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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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堤川靑年會 |
영어음역 | Jecheoncheongnyeonhoe |
영어의미역 | Jecheon Youth Associat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동환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북도 제천 지역에 있었던 청년 운동 단체.
[개설]
3·1 운동 이후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에 대비하자는 실력양성론이 대두되어 전국적으로 각종 문화 계몽 운동이 확산되었다. 충청북도 지역에서도 50여 개의 청년 단체가 조직되어 지역의 교육 및 문화·사회 운동에 적극 나섰다. 제천청년회도 그러한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의 하나로 지역 사회에서 교육을 비롯한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변천]
제천청년회는 1919년 가을에 시작되었으며 1920년 7월 11일 제천공립보통학교에서 이은영·이관의·박노태·김학간·이석영·이교준·윤갑·박이양·이재호·신경휴·이건복·이영필 등 유지들이 발의하여 정식으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회장 이희직, 부회장 이은영, 총무 이재배를 선출하였다. 1925년 8월에 건물 면적 462.81㎡ 규모의 회관을 신축했으며 같은 해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약 100여 명을 대상으로 노동 야학을 개설하였다. 개설 과목은 에스페란토어, 중국어, 부기 그리고 주산이었으나 실제 운영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제천청년회가 어느 시점에 와해되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명확하지 않다. 다만 1930년대 이후 일제의 탄압이 본격화되면서 각 지역의 청년회 활동이 유명무실화 되었던 추세로 볼 때 제천청년회도 그러한 궤적을 걸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제천청년회는 노동 야학의 개설, 강연과 토론회 개최, 연극 공연, 체육 대회 개최 등 지역을 계몽하는 사업을 전개하는 한편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비판하는 등 전방위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창립총회에 지역 경찰서 서장이 참석하는 등 지역 경찰의 지속적인 감시와 억압을 받았다.
제천청년회는 총무부, 평의부, 재무부, 덕육부, 지육부, 체육부, 실업부, 위생부, 음악부, 구제부 등 10개 부서로 나누어 활동하였다. 1920년 8월 18일 회장 이희직의 취임식과 더불어 경찰서 서장의 강연, 김성진의 ‘우리 청년회에 대한 감상’, 이재호의 ‘자조와 예비,’ 이은영의 ‘청년의 열성’ 등의 강연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3,000여 원의 의연금이 모였으며 회원은 1,500명에 달하였다. 또한 당일에는 덕육부 주최로 ‘조혼(早婚)의 병폐’에 관한 신파 연극이 공연되었으며 관람자는 1,000여 명에 달하였다.
1925년 12월 29일에는 도박과 음주로 제천청년회의 체면을 훼손하는 회원들에게 경고문을 발송하였다. 1926년 1월 2일에는 ‘가정에 평화를 유지함에는 남자이냐? 여자이냐?’라는 연제로 남녀 토론을 계획했으나 경찰이 시기상조이고 풍기문란이라고 제지하여 무산되었다.
전반적으로 청년회의 활동이 미약하자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의욕적으로 매월 음력 15일마다 토론회 또는 강연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첫 번째로 ‘여자 교육이 남자 교육 보다 낫다’로 주제를 정했으나 남녀 토론은 절대불가라고 금지되어 1926년 4월 22일 임원 회의에서 남자들로만 토론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주제도 ‘체육이 지육보다 낫다’로 바꾸었다.
1926년 7월 28일에는 수재에 대한 구호 활동을 결의했으며 10월에는 청년 소인극을 개최하려 했으나 경찰의 제지로 금지되었다. 1927년 4월에 제천공립보통학교에서 중선 소년 정구 대회를 개최했으며 1928년 7월에는 호서 개인 정구 대회를 개최하였다.
[의의와 평가]
제천 지역 경찰의 지속적인 감시와 억압으로 제천청년회의 활동은 원활하게 전개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실력양성론의 일환으로 계몽적 성격의 문화 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노동 야학의 개설, 강연과 토론회 개최, 연극 공연, 체육 대회 개최 등과 같은 계몽 사업의 전개와 함께 지역 사회의 풍토도 비판하는 등 전 방위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제천청년회는 타 지역과 연계하고 시대의 흐름에 동참하면서 일제 강점기 제천의 새로운 지역 문화 구축에 일정 정도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