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5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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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二五戰爭 |
영어음역 | 6·25 Jeonjaeng |
영어의미역 | The Korean War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구완회 |
[정의]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북한의 남침으로 충청북도 제천 지역을 포함한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하여 3년 1개월 동안 지속된 민족상잔의 전쟁인 6·25 전쟁에서 제천은 전황에 따라 몇 차례나 공산군과 국군 및 미군에 의해 점령되면서 많은 희생과 갈등을 겪었다.
[제천 지역에서의 전황]
6·25 전쟁 초기에 강원도와 충청북도 북부 지역 방어는 국군 제6사단과 제8사단이 맡았다.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등 험준한 산세와 남한강이라는 자연적 방어선을 갖추고 있는 이 지역은 북한군 방어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월등히 우세한 전투력을 갖춘 북한군은 6월 27일 춘천 함락 이후 남진하여 7월 2일 양평·원주·횡성 일원을 점령하였다.
당초 제천 지역의 방어는 원주~제천 간 중앙선 축선의 북한군 저지 임무를 띤 국군 제2사단이 담당하다가 음성으로 이동하라는 작전 명령에 따라 제8사단에 인계되었다. 8사단은 강릉 지역 방어를 책임졌던 부대로, 제천으로 이동하라는 작전 명령에 따라 7월 2일에 제천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북한군과의 공방전 끝에 7월 4일에 가리파재를 돌파당하고 제천으로 분산 철수하였다. 7월 5일에는 충주로 이동하라는 명령 착오로 열차를 이용하여 이동하던 중 뒤늦게 잘못된 것임을 알고 북상하도록 했으나 제천이 이미 북한군에 점령된 뒤였다.
이런 일들은 개전 후 불과 며칠 만에 진행되었고 정부도 대책 없이 남하했으므로, 주민들은 영문을 모른 채 우왕좌왕하였다. 인민군이 군인이나 경찰, 또는 공무원 가족을 해친다는 풍문이 있어 관련 당사자들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읍내에서는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민간인들 중 37~38명이 군경에 의해 피살되었다.
인민군이 지나가고 난 뒤에는 ‘당조직’이 들어왔고 잠적했던 좌익적 성향을 가진 이들이 공개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지주들에게 착취당하고 머슴살이를 했던 이들이 공산당에 의해 전면에 내세워지면서 인민위원회, 여성동맹, 청년동맹 등이 조직되었다. 공산당은 이런 조직들을 이용하여 우익 인사를 탄압하고 북쪽의 체제를 선전하며 토지 개혁 등을 주장하였다. 당시 봉양면 면장이 희생되었고 새로운 권력의 눈치를 보던 주민들은 의용군이나 노무자로 징발당하기도 하였다.
유엔군이 인천 상륙 작전[9. 15]에 성공하면서 전황은 뒤바뀌었다. 국군 제2군단의 중동부 전선 탈환 작전으로 제8사단은 의성~안동~영주를 지나 9월 29일에 단양을, 30일에는 제천을 탈환하였다. 이로써 주민들은 비로소 3개월간의 공산군 치하를 벗어날 수 있었으나 공산군에 협조했다는 명분하에 즉결 처분당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또 한 번 공포가 엄습하였다.
얼마 후인 10월에 중국군이 개입하게 되면서 전황은 다시 뒤바뀌게 되었다. 1951년 1월 초에 서울을 또 빼앗은 중국군은 계속 남진하여 제천 지역까지 밀려들었고, 인민군 잔류 병력의 활동도 다시 활발해졌다. 1951년 1월 중순에 북한군 제2군단이 원주~제천~단양의 동쪽 산악 지대를 따라 남하하여 영월까지 진격하여 1월 말까지 제천과 영월 지역에서 공방전이 지속되었다.
1951년 1월 말을 전후로 북한군은 축출되었고 2월 11일 중국군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국군과 미군은 원주~제천 선에서 저지선을 형성하였다. 당시 제천 시내는 미군이 방어하고 있었으며, 제천시 송학면 도화리까지 침투한 중국군과 신월리에 진지를 구축한 유엔군 사이의 치열한 포격전이 전개되었다. 재래식 무기로 전세를 뒤집으려던 미군은 대규모 폭격을 퍼부어 중국군을 물러서게 할 수 있었고 이 저지선은 성공적으로 지켜지게 되었다. 이를 거점으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전세를 역전시켜 반격을 개시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제천 지역을 중심으로 치열한 공방전이 지속되면서 가장 많은 고충을 겪은 것은 민간인들이었다. 전투 상황에서 희생된 것은 물론이고 반강제 혹은 강제로 협조하였다가 점령군이 바뀌면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현지 사정에 어두운 미군 병사들이 혼전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을 적으로 간주하여 공격을 가한 사건들도 있었다.
[전쟁 피해]
전쟁은 많은 인명을 희생시키고 많은 가옥과 보잘 것 없었지만 대부분의 산업 시설을 파괴하는 등 수많은 피해를 입혔다. 제천 지역에서는 북한군이 점령한 후 각 면에서 학살당한 인사도 수십 명씩에 달했고 일부는 청주감옥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전쟁 중은 물론 종전 후 월악산, 금수산 등지의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도 인명이 살상되기도 하였다. 6·25 전쟁 과정에서 주민 1,624명이 사망했고, 517명이 행방불명되었고, 4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33명이 납치되었다. 또한 가옥 7,979채가 파괴되었으며 시내는 완전히 황폐화되었다. 공산군 토벌 과정에서는 237명을 사살하고 705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