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5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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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堤川神勒寺極樂殿壁畵-丹靑 |
영어음역 | Jecheon Silleuksa Geungnakjeon Byeokhwa Mit Dancheong |
영어의미역 | Geungnakjeon Hall and Wall Painting of Silleuksa Temple in Jecheon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 803-5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장준식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9년 4월 10일 - 제천 신륵사 극락전 벽화 및 단청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1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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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제천 신륵사 극락전 벽화 및 단청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
현 소재지 | 충청북도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 803-5 |
성격 | 단청 |
소유자 | 신륵사 주지 |
관리자 | 신륵사 |
문화재 지정번호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
[정의]
충청북도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 신륵사에 있는 조선 시대 벽화 및 단청.
[개설]
단청(丹靑)은 청색·적색·녹색·백색·흑색 등 다섯 가지 색을 활용하여 건물의 벽면과 나무에 문양이나 그림을 채색하여 장엄미를 드러내고, 목재를 보호하고 장식할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궁전이나 법당 등 특수한 건축물이 장엄하고 엄숙한 권위를 드러내도록 하는 효과를 지닌다. 단청은 다른 말로 오채(五彩), 또는 석채(石彩)라고 하며, 동양의 경우 다섯 가지 색으로 채색을 하는데, 이는 음양오행 사상을 나타낸다.
제천 신륵사 극락전은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갖춘 목조 건축물로, 건물의 내·외면과 벽을 단청과 벽화로 화려하게 표현하였다. 신륵사의 벽화는 19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후불탱화와 제천 신륵사 극락전 내외벽 벽화들의 존상이나 필법이 동일하고, 후불탱화의 화기에서 확인된 ‘가경십(嘉慶十)’이라는 명문을 근거로 1805년(순조 5)~1814년(순조 14)이라는 절대 연대를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천 신륵사 극락전의 화적과 후불탱화를 제작한 화승은 그림의 필법이나 상호 등을 토대로 할 때 19세기에 활동한 신겸으로 추정된다. 신겸은 스승인 홍안(弘眼)과 같이 출토력이 뛰어나 자신만의 도상을 만들었는데, 그러한 예 중의 하나가 제천 신륵사 극락전에 현존하는 벽화들이다. 개채자(改彩者)에 대해서는 법주사를 주 활동 무대로 삼았던 호영(湖暎) 박삼천(朴三千)이 가장 유력하다.
1960년대에 지어진 신륵사 중수기에는 단청에 대한 언급이 없고, 전하는 말에 의하면 1970년대 초에 월남화상(月南和尙)이 잠시 주석할 때 사다리나 비계를 설치하지 않고 손이 닿을 수 있는 부분만 개체했다고 한다. 단청의 현상으로 보아 개·보채는 그 이전에도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되며, 1920년대에 개체되면서 원형이 상당히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제천 신륵사 극락전 벽화 및 단청은 2009년 4월 10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위치]
제천에서 청풍 방면으로 지방도 82호선을 따라 중앙고속도로 남제천 나들목 입구를 지나 청풍 방면으로 1시간 정도를 남쪽으로 진행하면 제천시 수산면을 지나 충주 방면 국도 36호선에 진입한다. 이때 제천시 수산면 수산2리 시내버스 정류장 앞에서 좌회전하면 덕산면 월악리로 진입하는 월악길에 들어서게 된다. 신륵사는 월악리 마을에서 우회전하여 월악산 등산로와 같은 길을 따라가면 자동차 정류장이 마련된 마지막 장소에 위치하고 있다. 벽화는 제천 신륵사 극락전 외부와 내부 벽면에 위치하고 있다.
[형태]
제천 신륵사 극락전에는 136점의 벽화가 있는데, 내부에 남아 있는 벽화는 85점이다. 반자에 40점, 운각에 8점, 대량에 4점, 포벽에 15점 측면 벽에 10점, 하단 벽에 8점이 시문되었다. 내부의 벽화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하단 벽의 역사상과 화초도, 대량의 반용도만이 약간 변형되어 있다. 벽화의 주제는 서조도, 운룡도, 주악천인도, 여래도, 쌍룡도, 보살도, 나한도, 보현동자도, 아반존자도, 제16존자도, 문주동자도, 범왕제석도, 월악산영도, 금강역사도 등이다.
내부 단청은 19세기 초반 단청 문양의 색상과 조형적 특징을 면밀하게 살필 수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천장에서 주의초에 이르기까지 당시 화사들이 많은 공력을 들여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내부 단청에는 부재에 따라 다양한 문양을 시문하였다. 3출목 도리장여에는 연등초, 2출목 도리장여에는 방석초, 순각판에는 운문, 첨차와 첨차배에는 녹화머리초, 주두와 소로에는 결연, 평방과 창방에는 장구머리초와 병머리초, 제공배에는 적연화, 백연화, 청연화를 각각 장식하였다. 뜬장여에는 연등초, 뜬장여 받침에는 녹화머리초 등 다양한 문양의 단청이 내부 공간을 장식하였다. 내부 단청은 처음 시채(始彩)된 이후 훼손이 없는 원래의 상태 그대로인 것으로 보인다.
제천 신륵사 극락전 외부에 도채된 단청 문양을 각 부재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초배기, 이매기는 먹분긋기와 연화문을 중심에 배치하였고, 주위에 장단휘로 둘러싼 방석초형의 개판, 6엽 입화형의 착고, 겹녹화머리초로 둘러싸인 부연, 부연마구리면의 십자금, 4휘 연등초의 연목, 연단의 6판 연화문 등이 있다. 보머리는 녹화머리초로 둘러싸여 있고, 단면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비천상으로 추정된다. 도리장여는 정방형의 연등초로, 중앙에 온바탕을 넣었고, 측면은 반바탕으로 처리했다. 장여의 배는 색긋기로 되어 있고, 순각판은 운문으로 간결하게 처리하였다. 서까래에는 뒷목에 녹화머리초를 넣었다. 평방·창방은 같은 형태의 장구머리초를 썼고, 평방 뒷목에는 석간주 가칠에 담묵으로 당초문을 놓았으나 창방 뒷목은 석간주 가칠만 했다.
제천 신륵사 극락전 뒷면의 단청은 앞면보다 간결하다. 개판은 8엽의 연화를 둘러싼 방석초이고, 착고는 중심을 황방울로 잡아 그 기준에 따라 5엽의 연화문이 펼쳐져 있으며, 부연은 간단한 녹화머리초이고, 연단은 능형으로 구획한 먹바탕 위에 분방울로 처리했다. 보머리의 벌치면은 석간주 초틀임이나 단면이 많이 훼손되어 원형을 파악하기 어렵다. 도리장여 역시 간결한 녹화머리초이고, 순각판은 운문을 생략한 채 백분가칠만 했다. 첨차는 녹화머리초이고 주두는 결연금을 쓴 것이 확인된다. 평방·창방과 그 부재의 뺄목은 모두 녹화머리초이고 쇠서는 초틀임했으나 상단의 봉황문은 앞면과 달리 먹분으로 간결히 처리했다.
[현황]
외부 벽화는 51점으로, 도리장여에 10점, 포벽에 18점, 창방에 3점, 평방에 3점, 측면 벽에 17점이 그려져 있다. 외부 전면 초방의 개풍 사이에 10폭의 산수화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담채화라는 특성이 있는 곳을 진채로 보채하는 과정에서 원형이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포벽에는 9점의 여래도가 있다. 역시 보채가 심하지만 진채화라는 특성상 원형 추측이 가능하다. 벽화의 주제는 산수도, 여래도, 서조도, 반룡도(蟠龍圖), 토어도(吐魚圖), 유선도, 화초도, 「혜가대사단비도」, 「반야용선도」, 「상품상생환생도」, 「사명대사행일본지도(泗溟大師行日本之圖)」 등이다.
특히 사명대사와 관련한 그림은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274호로 지정된 「사명대사일본상륙행렬도팔곡병(泗溟大師日本上陸行列圖八曲屛)」이 있으며 벽화로는 제천 신륵사 극락전에서 확인된 「사명대사행일본지도」가 유일하다. 벽화는 하단에 사명대사가 탄 가마의 행렬도를 배치하였다. 오른쪽 상단에는 무릎을 꿇은 왜병과 조총을 태우고 부스는 장면이 있고 왼쪽 상단에는 성이 그려져 있다. 오른쪽 상단의 외병이 포박당하는 부분과 왼쪽 상단의 성곽 부분은 벽체 자체가 다시 보토된 흔적이 육안으로도 확인된다. 이처럼 원형 위에 개칠을 하고 후대에 추가적으로 다른 내용을 첨가된 형태의 벽화는 드문 예이다. 벽화는 시간이 흐르면서 상당 부분 증감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가장 눈에 띠는 것은 포박도에서의 왜병의 복식이다. 벽화 속의 복식은 19세기 초 일본군의 복식에서 명치유신 이후 근대화된 군복으로 후대에 개채하면서 새로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이 벽화의 행렬이 이루어진 상황이나 장소와 관련해서는 사명대사 일행이 일본에 도착한 모습이라는 견해와 일본으로 떠나는 행렬이 조선의 경유지를 지나는 모습이라는 견해, 사명대사가 임무를 마치고 조선으로 귀환하는 장면이라는 견해가 있다. 벽화의 화제와 구성으로 보아 사명대사 일행이 강화 사절로 출발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라는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 통신사의 경유지가 신륵사가 위치한 인근의 충주였다는 점과도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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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와 평가]
제천 신륵사 극락전의 단청과 벽화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당시의 화풍과 제작 기법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특히 「사명대사행일본지도」는 사명대사와 관련된 벽화로는 한 점밖에 없는 중요한 유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청과 벽화는 건물의 내·외부에 그려지는 특성상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훼손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문화재에 대한 세부 조사와 보존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