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6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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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堤川月光寺址圓朗禪師塔碑 |
영어음역 | Jecheon Wolgwangsaji Wollangseonsatapbi |
영어의미역 | Monument to Priest Wollangseonsa of Wolgwangsa Temple site |
이칭/별칭 | 월광사 원랑선사탑비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탑과 부도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장준식 |
문화재 지정 일시 | 1963년 1월 21일 -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 보물 제360호로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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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 보물 재지정 |
건립 시기/일시 | 890년 |
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5 |
원소재지 |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
성격 | 부도탑비 |
양식 | 비석 |
재질 | 화강암|대리석 |
크기(높이) | 395㎝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국립중앙박물관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
[정의]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제천 월광사지에 있던 원랑선사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
[개설]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월광사 터에 전해오던 탑비로, 890년(진성여왕 4)에 건립되었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6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원랑선사[816~883]는 성은 박씨이며 자는 태융(太融), 시호는 원랑(圓朗)이다. 통일 신라 시대의 승려로 856년에 당에 유학하여 앙산에 징허대사를 섬긴 후 귀국하였다. 신라 경문왕이 대사의 선덕을 듣고 월광사의 주지로 임명하였다.
[건립 경위]
원랑선사가 68세로 입적하자 헌강왕이 ‘원랑선사’라 추시(追諡)하고 대보선광(大寶禪光)이라는 탑명을 내려 김영(金穎)에게 비에 새길 글을 짓게 하였다. 글씨는 순몽(淳蒙)이 썼다.
[위치]
월광사 원랑선사탑비가 본래 위치하였던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일원은 경상도와 충청도의 도계를 이루는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육로와 수로가 연결되는 고대 교통로의 요충지 중 한 곳이다. 제천 월광사지로 가려면 송계리 월악산 매표소 건너편으로 경작지와 산자락이 만나는 곳에 난 작은 소로를 따라 산 중턱까지 올라가야 한다. 길이 끝나는 곳에 평탄지가 있는데 그 일대가 제천 월광사지이다. 그러나 월광사 원랑선사탑비는 일제 강점기에 반출되어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형태]
비좌와 이수는 화강암재이고 비신은 대리석재로 되어 있으며, 비석의 총 높이는 395㎝이고, 비신 225㎝, 너비 96㎝, 두께 24㎝, 자경 2.1㎝이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통일 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석비 형식을 따랐으며, 전체적인 비례가 잘 조화된 단아한 조형을 이루고 있다. 비문은 가는 선으로 방안을 구획하여 그 안에 구양순체의 해서체 글씨를 써 넣었다. 전체적으로 대좌 위로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얹은 모습이다. 거북의 머리는 용두 형태를 하고 있다. 목은 짧으나 곧게 세웠고 밑에는 복갑(腹甲)이 있다. 귀부의 등에는 귀갑문을 덮었는데, 등의 중앙에 마련된 비좌에는 구름무늬를 힘차게 표현하였다. 이 구름무늬 중간 중간에 변화된 연꽃무늬를 서로 어긋나게 배치하여 조화를 이루고 있다.
구름무늬 위의 비좌 네 면에는 안상을 전면에 5개, 측면에 2개씩 조식하였다. 비신을 받치는 비좌의 상단에는 2단의 각형 받침대와 1단의 몰딩형 받침대가 있다. 몰딩을 둔 받침대 사방으로 단엽복판의 복련을 조식하였다. 연판은 각 면의 중앙을 기준으로 좌우가 서로 대칭이 되도록 비스듬하게 조각하였다. 비신에는 전면에만 글씨를 새겼다. 옥개석에 새긴 용두의 조각은 매우 사실적이며, 전체적으로 비례감이 훌륭하다.
[의의와 평가]
통일 신라 후기에 나타나는 형식화된 조형을 보여주는 비석으로, 조각 수법이 우수하다. 충청북도 지역에 위치한 부도탑비 중에서는 가장 선행되는 양식으로 조각사와 미술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명문은 신라 하대의 역사 연구 사료로서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