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7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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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明聖王后 |
영어음역 | Myeongseongwanghu |
영어의미역 | Queen Myeongseong |
이칭/별칭 | 명성(明聖),정헌문덕(貞獻文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제규 |
[정의]
청풍을 본관으로 하는, 조선 시대 제18대 왕인 현종의 비(妃).
[가계]
본관은 청풍(淸風). 성은 김씨(金氏)이다. 아버지는 영돈녕부사 충익공(忠翼公)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고, 어머니는 송씨(宋氏)이다. 1661년(현종 2) 8월에 숙종을 낳았고, 이후 명선(明善)·명혜(明惠)·명안(明安)의 세 공주를 낳았다.
[활동 사항]
명성왕후(明聖王后)[1642~1683]는 1651년(효종 2) 세자빈(世子嬪)에 책봉되어 어의동 본궁(於義洞本宮)에서 가례(嘉禮)를 올렸고, 1659년(현종 즉위년) 5월 왕비로 책봉되었다. 송시열(宋時烈)과 같은 서인(西人)이었던 부친 김우명의 슬하에서 성장하여 당파적 경향이 강하였다. 궁내의 남인 세력의 여자들을 추방하는 일에도 관여하였는데, 당시 남인가의 여인이었던 희빈 장씨(禧嬪張氏)[장옥정(張玉貞)]를 궐 밖으로 내치기도 하였다. 특히 효종이 승하한 후에 인조의 비 장렬왕후의 복상(服喪)과 효종의 비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 복상 문제에 부딪혔을 때 서인의 편에 서 남인들을 축출하기 위해 많은 계략을 꾸몄다.
13세의 어린 아들 숙종이 왕에 오르자 조정의 일에 자주 간섭하여 남인의 비난을 샀으며, 인평대군(麟坪大君)[1622~1658]의 세 아들 복창군(福昌君)과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이 숙종의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그들이 궁녀들과 불륜 관계를 맺었다고 모함한 홍수지변(紅袖之變)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고(誣告)로 판명되어 부친이 공격당하자 왕이 집무를 보는 정청(政廳)으로 나아가 대성통곡한 끝에 인평대군의 세 아들을 귀양 보내기도 하였다.
1683년(숙종 9) 12월 5일 창경궁 저승전(儲承殿)에서 42세로 승하하였다. 지능이 비상하고 성격이 과격하여 궁중의 일을 다스리는 데 거친 처사가 많았고, 숙종 즉위 초에는 정무에까지 간여하여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묘소]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번지 동구릉 경내에 있는 숭릉(崇陵)으로 현종의 능과 함께 조성된 쌍릉이다.
[상훈과 추모]
『숙종실록(肅宗實錄)』 9년(1683) 12월조에 명성왕후의 시호(諡號)와 휘호(徽號)를 의논한 기록이 나와 있다. 곧 “여러 대신과 2품 이상이 회의하여 대행 왕대비(大行王大妃)의 시호를 올려 ‘명성(明聖)’이라 하고, 휘호를 ‘정헌문덕(貞獻文德)’이라고 하였다. …… 그리고 전호(殿號)는 ‘영모(永慕)’이며, 능호(陵號)는 현묘(顯廟)의 구릉(舊陵)이었으므로 따로 정하지 아니하였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