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7025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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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漢羅山橫斷道路開設 |
영어음역 | Hallasan Hoengdan Doro Gaeseol |
영어의미역 | Construction of the Hallasan Cross-cutting Road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황경수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일도1동의 중앙사거리에서 서귀포시청 사이에 있는 41.1㎞의 도로와 국도 99호선(1100 도로) 오라 로터리에서 서귀포시 중문동 일주 도로까지의 35㎞구간을 잇는 도로.
[개설]
1932년에 제주와 서귀포를 잇는 한라산 횡단 도로를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이 도로는 제주시와 서귀포를 연결하는 한라산 동쪽 횡단 도로로서 당초에는 1932년 국유림 횡단 도로 공사를 통해 임도로 개설되었다.
그 뒤 1935년 일본군의 군사 목적으로 일부 도로가 정비 및 관리되어 오다 1938년 2월 1일 전라남도 고시 제216호 지방도로 지정되었다.
[역사적 배경]
한라산을 횡단해 제주시와 서귀포를 잇는 도로에 해당하는 곳의 땅을 거의 무상으로 몰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상으로 농민들을 부역에 동원하였는데, 이러한 일은 면장의 지휘 하에 강압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도로의 개설로 도내 교통의 원활함을 가져왔겠지만 실은 일제의 자원 침탈 의도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당시 일본군이 건설한 산악도로는 해발 900m 한라산 국유림 지대인 어승생수원과 어승생봉을 중심으로 한라산록을 띠를 두르듯이 만들어 놓았다.
일본인들은 이 도로를 ‘하치마키’[일본어로 머리띠의 의미]도로라고 하였는데, 서쪽으로는 지금의 한밝교 영실을 거쳐 노루봉 뒤 영실 분기점인 법정악에 이어졌고, 동쪽으로는 수악교 상류와 논고악, 성판악에서 수장악-관음사-천왕사로 이어졌다.
[목적]
제주의 산악 도로는 예로부터 주민의 방목과 산림 벌채 등을 위해 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말 일본군이 대미 결전의 전초 기지로서 20만 대군을 한라산록에 주둔시켰는데, 이들 일본군은 군사 행동을 위해 물이 있는 곳을 골라 도로를 개설하였다.
[경과]
일본군의 군수 물자 수송에 사용되던 국도 99호선은 4·3사건이 발생하면서 이후 1954년까지 방치돼 오다 1957년부터 1961년까지 일부 노선에 경제 부흥 특별 회계 사업으로 도로 폭 6.5m로 노면에 4m 넓이로 자갈을 깔았다. 이 도로는 제주시 오라 로터리에서 한라산 서쪽 서록 해발 1,100m를 정점으로 하여 서귀포시 중문동 일주도로까지의 35㎞의 도로이다.
한라산 서부 횡단 도로로서 본격적으로 건설에 착수한 것은 1968년 7월 정부가 폭력배를 일제히 소탕하기 시작, 이 때 잡힌 폭력배들을 교화하기 위해 국내 각 건설 현장에 배치, 노역을 시켜 형벌을 면제해 주었는데 이 때 제주도에는 약 500명이 이른바 ‘국토 건설단’이란 이름으로 배치되었다.
이들은 현재의 어승생 저수지 북쪽에 천막을 쳐서 격리 수용되어 도로 건설에 투입되었다. 당시 제주도지사였던 구자춘은 이 도로 건설을 위해 측량반을 독려하여 직접 밀림 속을 수십 회 오가면서 노선을 정했다.
건설 단원들은 측량이 끝나는 대로 노선을 따라 나무를 베고 정지 작업에 투입되었으며, 해발 1,100m까지 오르내리는 급경사를 완만하게 우회시키는 어려운 공사여서 착공 6년 만인 1973년에야 완공되었다.
이렇게 국도 11호선은 일제 강점기 때 이용되다 중단되었지만 제주시와 서귀포 간을 신속히 연결할 필요성이 제기되어 1차 복구 공사는 1958년 6월 6일에 완료되었다. 총공사비 1,500만환으로 제주시 삼의악교로부터 수장원 동북쪽까지 1차로 7,440m길이를 착공하여 7개월 만이었다.
제주시를 기점으로 한라산 동쪽 산허리를 거쳐 서귀포까지 전장 45㎞의 횡단 복구공사는 예산 관계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중산간 도로인 제주시 삼의악교부터 서귀포읍 토평리까지 35㎞의 길이를 국고 보조로 복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일제 강점기 때 평면 도로로 개척한 채 버려둔 것을 23년 만에 복구에 착수한 것이다. 그러므로 길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잡목이 우거진 길을 너비 6.5m로 양쪽으로 1m 깊이의 도랑을 파고, 노면에는 4m 넓이로 돌 자갈을 깔아 놓았다.
공사 구간 내에는 세월(洗越) 2개소, 암거(暗渠) 2개소, 도수로(導水路) 6개소를 신설하였다. 공사는 제주시 국화 기업사가 청부하여 작업 일수는 186일이었으며, 연간 인부는 19,300명, 1대의 덤프트럭이 80일간 외도동, 오라동, 애월읍 하귀리 등지에서 돌 자갈과 모래를 운반하였다.
2차 공사도 국화기업사가 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횡단 도로 삼의악교 가기 전 2㎞와 수장원 남쪽 4.37㎞의 복구공사를 국화기업이 1,897만환에 낙찰한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총 복구공사 예정거리 30㎞ 중 절반에 가까운 거리가 복구되었다.
본격적인 횡단 도로(5·16도로)의 포장은 1962년 3월 23일에 기공하여 1969년 10월 1일에 개통식을 가지면서 완성되었다. 이 도로의 포장 완공으로 제주~서귀포 간 5시간을 1시간여로 단축하고 원시림을 감상할 수 있는 관광도로로서 절찬을 받게 되었다.
그 뒤 도로의 확장 공사가 추진되어 1981년에 완공할 때까지 총 공사비는 53억2300만원이 투입되었다. 또한, 1972년 4월 18일부터 1982년 12월 31일까지 통행 요금을 보면 대형버스 400원, 중형 버스 250원, 소형 승용차 200원, 트럭 150원, 소형 화물차 100원이었고, 징수 요금은 3억7728만7000원 이었다.
통행료를 폐지한 이유는 이용 차량들이 불편하고 또 도로가 1963년에 국도로 지정된 상태에서 도가 요금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963년 2월 6일 국도로 지정되면서 5·16 도로로 명명하고 박정희 대통령 휘호로 2m의 자연석에 음각하여 산천단 북쪽 도로변에 세우고, 당시 도로 건설을 추진한 김영관 도지사의 공적비는 750m 성판악 입구에 세워져 있다.